▲ |
파리외방전교회는 우리 천주교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이곳에서 프랑스의 젊은 신부들이 교육을 받고 세계 여러 나라로 나갔다.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쪽이었다. 처음 나 간 곳은 1658년 베트남으로 부터였다.
이곳에서 우리나라에 전교하러 신부가 들어 온 것은 1836년 1월의 일이었다. 프랑스인 모방 신부부터였으니 이미 170년 전의 일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1886년 한불수교가 이뤄진 이후부터는 선교사들이 순교하는 일은 없어졌다.
뤼 뒤 박에는 학교와 성당 그리고 순교자 기념실이 있어 양국 천주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 보고’가 되어 있다.
지금도 세계 각국으로부터 젊은 신부들이 공부하러 와 있다. 우리나라 신부님도 몇 분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나는 명동성당 이성만 주임신부님이 소개장을 써 주었고, 전주성당 김준호 주임신부님이 도와주어 그곳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이성만 신부님이 써준 소개장 속의 신부님은 퀴니 신부였다. 이름이 어디선가 귀에 익은 신부님이었다.
퀴니(Jean Michel Cuny, 1930~) 신부님의 이름은 우리가 충청남도 근대건축물 목록을 작성할 때 본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 분은 40여 년 전 공주중동성당(公州中洞聖堂)에서 시무한 적이 있었다. 10대 주임신부였다. (천주교 대전교구 중동(공주)교회 90주년 출판위원회, 『국고개』. 가톨릭출판사, 1987)
중동성당은 일제시대인 1934년 착공되어 36년 준공된 붉은 벽돌 고딕 성당이다. 최종철(崔鍾哲) 마르코(1890~1945) 신부 때 세워진 후 공주의 상징적 건물이 되었다. 지금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구내의 사제관과 함께 세워졌다.
그는 프랑스인으로 알사스 지방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외과의사였다. 퀴니 신부는 한국에서 권충신(權忠信, 1930~)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권 요한 미카엘 신부로 불렸다. 그는 1956년부터 63년까지 7년간 공주읍에서 시무했다. 보좌신부와 주임신부를 각각 겪었다.
당시 우리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의 공주에서였다. 더구나 프랑스와 우리의 격차는 엄청날 때였다. 그가 ‘뵙고 싶은 엄마’에게라하며 공주읍에서 프랑스로 보낸 편지(1962년 2월 8일)를 보면 당시 상황을 어림잡을 수 있다.
“…지난달의 하반기는 대단히 추웠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은 새벽 미사에 많이 나왔읍니다. 그들 중에는 양말도 신지 않은 아이들이 많이 있으니 얼마나 씩씩합니까? …3일 전부터 주춤한 것은 음력 정초 즉, 설날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큰 걱정은 인근에 사는 주민들의 가난 때문이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읍니다.”
라고 하고 있다.
‘뵙고 싶은 엄마’라는 편지(5월 2일)에는,
“…이 곳의 본당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읍니다. 빠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이 교구에 제일 많이 배치되어 있읍니다.… 주교님은 새 본당 설립을 강조하고 있읍니다. 제 생각으로는 공주 본당도 둘로 분리하고 유구(40km거리)도 새 본당으로 승격 되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고 있다. 파리를 빠리라 하는 것이 재미있다. 그리고 유구에 성당을 세우려는 의지가 보인다.
그는 당시 2마력짜리 차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편지를 보면 그가 사제관에서 공주군수와 내무과장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1963년 퀴니 신부가 공주로부터 파리 외방전교회로 옮겨 갈 때 공주는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전해 주었다. 그는 공주 시민이 된 것이다. 퀴니 신부가 거주하던 그 사제관은 지금 교육관이 되어 있다.
그는 1963년 2월 초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부터 귀임 명령을 받는다. 그는 날 벼락같은 인사발령이었다고 했다. 제 2고향 같은 한국과 공주를 떠나는 마음을 ‘사랑하옵는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2월 7일)에 표현하고 있다.
“제가 공주 본당에 와서 많은 사업계획을 짜고 보람을 찾는 가운데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내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빠리 외방전교회 총장님으로부터 날벼락과 같은 명령이 떨어졌읍니다. 저를 보고서 빠리로 돌아와서 성소운동을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다시 뵙는다는 기쁨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이 나라는 제가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곳이어서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입니다.”
그는 이어
“이 본당에 마음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나 그러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제가 저들에게 조금밖에 주지 않았으나 저분들과 함께 살고 느끼는 것을 배웠으며 공주지역이 저의 친정과 같이 되었읍니다.”
그는 공주를 떠난 후도 한국과 연을 끊지 않고 있다. 1963년 초 파리 외방전교회로 가서 성소 책임자로 5년간 지냈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 황(黃) 주교의 비서 역을 했다. 그리고 5개월 후 다시 파리 외방전교회 부총장에 임명되어 파리로 돌아간다. 그후 전교회의 비서실장(1974~86)과 전교회의 정보를 담당하는 프랑스 아세아 연락 책임자(1986) 등을 겸직한다. 이후 최고위직인 총장(Superieur de maison)직에 오른다.
그 신부님이 지금 그의 방에서 나를 만나주고 있다. 그는 3년 전쯤에 공주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하며 향수에 젖는 듯 했다. 벌써 74세의 나이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