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1. 쌀·콩·청자 그대로 수장
2. 조운선 선원들의 나날
3. 의항·굴포운하 개척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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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마도 1~4호 발굴조사를 실시해 선체 일부가 출수되고 있다. (사진=국립해양유산연구소) |
『"나머지 침몰 장소는 어디였소?"
"모두 태안 근처였습니다. 안흥량에서 두 번, 쌀썩은여에서 한 번."
"쌀썩은여는 무엇이오?"
"원산도와 안흥량 사이의 협로입니다. 조운선들이 암초에 부딪히는 바람에 쌀이 바다에 빠져 썩는 곳이라고 하여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는군요."』
김탁환 작가가 2015년 내놓은 소설 '목격자들-조운선 침몰 사건' 1권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쌀 1000석씩 실은 조운선 20척이 비슷한 시기에 각기 다른 곳에서 침몰한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데, 세곡을 빼돌린 후 배를 고의로 침몰시키거나 세곡에 물을 타서 양을 일부러 늘리는 당대의 이권과 탐욕을 묘사하고 있다. 실제 기록에서도 1395년(태조 4년) 5월 17일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침몰했고, 같은 해 8월 7일 충청도 조운선 10척과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파선되는 등 난파 사고가 매년 수차례씩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또 조운선이 파선되면 그 지역 수령은 지체없이 출동해 물에 빠진 세곡을 건져내야 했다. 1873년(고종 10년) 6월 안흥량 바닷가에서는 밀양의 후조창에서 세곡을 싣고 서울로 향하던 17척의 조운선단이 안흥량 초입에 있는 거아도 해역에서 거센 폭풍을 만났다. 결국 지자선 1척이 좌초됐고 안에 선적된 세곡 1058석이 바다에 쏟아졌다. 태안부사 이희눌(1819~1878)이 평신첨사와 구증차사원을 각각 임명하고 이들로 하여금 갈고리로 물에 빠진 곡물을 건져 썩기 전에 시가에 맞춰 내다 팔도록 했다. 그리고 침몰한 지자선의 선장과 살아남은 격군들을 일일이 신문해 고의로 침몰시킨 것은 아닌지, 세곡 외에 사사로운 적재물을 더 실어 과적했던 것은 아닌지 실제로도 조사했다. 쌀과 콩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 잇달아 침몰하면서 태안군 안면읍 신야리 앞바다에 위치한 한 암초는 지금도 '쌀썩은여'라고 불리고 있다. 다만, 마도4호선은 침몰 후에 세곡이 물 밖으로 회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경호 국립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9월 12일 '마도4호선 발굴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안흥량에서 패몰한 선박들의 상당수는 이물판이 밀리거나 배의 외판이 틀어져서 바닷물이 밀어닥침에 따라 결국은 배를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이 종종 확인된다"라며 "해난 사고가 풍랑때문에 일어난 사례도 있지만, 그보다 갑작스런 안개, 일기의 변화, 조수의 변동 등으로 인해 일어난 경우도 많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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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운홍의 풍속도 '고깃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유한 조선시대 화가 유운홍의 풍속화 '고깃배'에는 세곡운반선에 배를 모는 뱃사람이 잘 묘사되어 있다. 조운선을 새로 만들 때는 호남의 경우 1척당 작은소나무 75그루, 애소나무 26그루, 어린소나무 59그루가 소요됐다. 조정에서는 각 지역의 조선소에서 쓸 소나무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는데 안면도의 소나무가 곧잘 쓰였다. 관선 중심의 조운제도가 시행되었던 조선 전기에는 수군이 조운 업무를 담당했다. 왜구 약탈때문에 조운이 어려워지자 수군이 세곡 운송을 맡은 것인데 조군 또는 조졸이라고 불리고 사공과 격군으로 구분됐다. 조운선 1척에 약 38명의 인원이 배속되어 이들은 2교대로 근무했으므로 운항 시 실제 탑승 조졸은 18명 가량이었다. 세곡 운송을 위해 장기간 물 위에서 생활했으므로, 먹고 자는 일은 작은 배에서 모두 이뤄졌다. 선체인양을 준비 중인 마도4호선에서 발견된 수저, 솥, 항아리 형태의 도기호 안에서 생선 뼈, 빗, 패랭이 등이 당시 조운선에 타고 있던 사공이나 격군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패랭이는 대나무로 엮어서 만든 모자를 말하는 것으로 뱃사람들은 패랭이를 머리에 쓰고 갈옷을 입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마도4호선에서는 삼발이솥과 노지돌, 대형 숟가락이 발견됐는데, 솥은 선상에서 밥을 지어먹는 용기로 노지돌에서는 표면에 불로 그을린 자국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취사를 위해 불을 피웠던 화덕자리에서 선박으로 옮겨붙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노지돌을 바닥에 깔았을 것으로 보인다. 함께 발견된 대형 숟가락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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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1호 재현선박. |
▲150년 전 금강~한양 29일 항해 '조행일록'
1874년(고종 11년) 12월 함열현감이자 성당창 조세운영관으로 임명된 조희백은 1875년 3월 조운선단을 이끌고 금강 중하류에 있는 익산시 웅포를 출발해 4월 18일 한양의 광흥창에 도달하는 29일 동안의 여정을 '조행일록'에 기록했다. 함열과 진산, 익산, 금산 등 8개 읍에서 거둔 세곡 1만6000석을 조운선 12척에 나눠 적재해 성당창을 떠나 3월 25일 항행을 시작했다. 조운의 성패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 바람이나 조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공의 항해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었다. 조운선이 한양에 닿기 위해서는 먼저 금강을 따라 군산 앞바다고 나간 뒤 동북쪽과 서북쪽을 향해 운행해야 했다. 금강을 따라 내려갈 때는 썰물과 함께 동풍 또는 남동풍을 타야 했고, 군산 앞바다에서는 태안 안흥량까지는 남동풍을 타고 북서쪽을 향해 가다가 안흥량을 지나서는 다시 남서풍을 타고 북동쪽을 향해야 했다. '조행일록'에서는 원하는 바람이 불지 않아 운항하지 못하거나, 안개 끼는 날에는 뱃머리를 때려 소리를 내면서 서로 거리를 유지하고,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줄을 가라앉혀 깊이를 측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한정훈 국립목포대 사학과 교수는 '마도4호선 발굴 10주년 기념 학술대회' 토론자로 참석해 "19세기 조운 규정의 강제력 상실과 낮은 기술력과 부정·부패로 인한 해난사고의 급증, 조운을 둘러싼 불평등 등으로 세곡의 수송효율성이 악화된 시기로 보는 시선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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