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도움으로 부랴부랴 서둘러 목동 선병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서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다음날 각종 검사를 받고 입원을 했다. 의사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요로결석증도 급하지만 전립선에 문제가 있으니 조직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라고 했다.
대전에 사는 딸과 서울에 있는 아들이 놀라 뛰어왔다. 학교 출근도 못한 채 연가를 내고 부랴부랴 뛰어 온 것이었다. 1주일 내내 딸이, 출근 전에도, 퇴근 후에도 다녀갔다. 대견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드디어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날이 왔다. 서울 사는 아들, 대전 있는 딸이 초조한 낯빛으로 곁에 서 있었다. 무슨 선고라도 받는 듯한, 긴장한 순간이었다. 곁에 있는 자식들이 든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들딸이 울타리 같아 적이나 안심이 되었다. 드디어 의사 선생님이 입을 얼었다. 중형선고를 받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psa 수치가 235, 전립선 암 4기이지만 전이는 되지 않았습니다."
필경 혹시나 했던 마음이 무너졌다. 안색이 변했다. 고개를 떨궜다. 흘낏 보니 자식들이 한숨만 쉬고 있었다. 낯빛이 사색이 된 채 어떤 말도 잊은 듯 했다.
낯빛이 안 좋은 자식들을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한 마디 했다.
"이 아비도 암 4기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처음은 낙심을 했다. 하지만 전립선암은 타 암과는 달라 수술 후 예후도 좋고, 착한 암이라 들었다. 이 아비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다. 나 이 병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해오던 모든 활동 정상으로 할 거다. 복통으로 응급실 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전립선암을 전이가 안 된 상황에서 알게 됐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너희들도 한숨만 쉬지 말고 힘내어라."
아비의 말에 안심이 됐는지 애들의 한숨이 그쳤다. 안색까지 밝아졌다. 남매가 하는 말이 "서울 큰 병원 가야 한다"며 인터넷 검색에 바빴다. 천우신조인지 아산병원에 예약이 되었다. 날짜까지 8일째로 잡혔으니 이 어찌 감사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서 정해진 날짜에 내원하여 진료를 받았다. 혼자 병원에 다녔더라면 서울 지리에 어두워 고생을 많이 했을거다. 게다가 복잡한 병원구조 건물 속에서 어지간히 더듬벅거리고 힘들었을 것이다.
'자식의 울타리가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대전서 서울까지 그 먼 병원 오고갈 때는 아들딸이 함께 했다. 진료 받을 때마다 곁에는 아들딸이 늘 그림자로 와 있었다. 여러 번 내는 연가에 학교장이나 교감, 동료교사들의 눈치도 봤을 것이다. 자식이지만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어려서는 남매가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사이좋게 이 아비한테 효도하느라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이 마냥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 검사를 받는 곳마다, 의사선생님의 진료를 받을 때마다 내 곁에는 믿음직한 울타리가 있었다. 곁을 지키는 남매 울타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순간순간이 오버랩 되어 날 울리고 있었다.
결혼 4년 만에 낳은 아들이 가져다 준 농장지경(弄璋之慶 :아들 낳은 즐거움)으로 아내와 함께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들이 꼬마 6살 때, 세발자전거 타고 놀던 모습도 떠올랐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들어오지 않아 유괴당한 줄 알고 신고한 일도 생각났다. 실종신고로 대동 동사무소가 확성기 방송을 했다. 요란한 확성기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들 서울대학 합격소식으로 아내와 밥 먹다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아들을 데리고 인사를 가 담임선생님 앞에 서울대합격증을 놓고 큰절을 시키던 모습도 보였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을 가르치기 위해 아들과 함께 선영에 갔다. 상석 위에 서울대합격증을 놓았다. 조상님께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 모두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또 딸의 어렸을 때 모습이 살아났다. 산부인과에서 낳았을 때 숨이 고르지 못하고, 호흡 상태가 좋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애를 태웠다. 원장님이 "아기에겐 인큐베이터가 필요한데 그게 없다"라고 했다. 다급한 생각에 고3 때 내 반 학부형이었던 방소아과 원장님을 찾아갔다. 덕분에 딸이 위기에서 살아났다.
말하자면 딸애의 생명의 은인이 방소아과 원장님인 셈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계제가 될 때마다 "우리 보라가 시집가기 전에 생명의 은인, 방소아과 원장님을 꼭 찾아뵈어야 하는데…"하며 되뇌는 말을 종종 했다.
감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에 은행동 천변에 있는 방소아과를 찾았다. 하지만 이사로 그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몇 년째 수소문으로 사시는 곳을 알아냈다. 날짜를 잡아 딸을 데리고 방원장님을 찾아뵈었다. 승용차 트렁크 속에는 처가에서 주신 참깨 1되, 숙모님이 주신 검정콩 1말, 마늘 1접, 옆에는 딸애가 실을 사다가 뜨개질로 만든 장갑 한 켤레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30년 만에 딸 생명의 은인을 찾아뵙는 게 왜 이리 좋은지 몰랐다. 원장님 내외분은 무척 좋아하셨다.
이렇게 자란 아들과 딸이 암 환자인 나를 지키고 있다. 아니, 울타리가 되어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 주고 있다.
나의 든든한 울타리 나의 분신이여! 너희 남매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땐 농장지경으로, 농와지경으로 첫 기쁨을 주더니 이제 철들은 나이엔 울타리가 되어 날 든든하게 하는구나. 금쪽같은 내 새끼 두 남매야, 같은 엄마 젖 먹고 자란 것을 생각하여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라. 내 울타리가 돼 준 것처럼 빈자들한테도 따뜻한 장갑이 되어라.
영민아, 보라야! 많이 고맙다. 너무 든든하다. 하늘땅땅만큼 사랑한다.
'자식의 울타리가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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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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