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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균 소장 |
처음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나약했던 신라는 안중에도 없고, 바닷길로 들어온 당나라 군대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이 버틴 고구려는 흔들림이 없는 강한 나라였다.
문제는 연개소문이 죽고 고구려 지도층이 분열하면서 시작됐다. 그렇게도 강력했던 군대가 사분오열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고구려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지도층의 분열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알려준 교훈적인 일이다. 이후로 고구려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펼쳐보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제 고구려에는 '남은 사람'(遺民)과 '떠도는 사람'(流民)만 남았다. 분열의 한복판에서 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눈뜨고 경험한 한(恨) 많은 사람들이다. 갈 곳 없는 백성들은 뼈저린 패배의 땅에 남아 그래도 고향을 지키며 미래를 기약했다. 일부는 '랜드피플'이 되어 대륙의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20세기 내전에 시달리던 동남아국가들의 수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보트피풀'이 되어 바다로 나갔듯 7, 8세기 고구려 유민들은 '랜드피풀'이 되어 대륙의 곳곳으로 흩어졌다.
유난히 자존심이 강했던 고구려 유민들은 그렇게도 얕잡아보던 신라에 종속되어 고개 숙이고 살기보다는 그래도 세계 최강 당나라로 건너가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당나라의 외국인 포용정책과 어우러진 "이민족으로 이민족을 제압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외교정책도 고구려인들을 유혹했다. 서쪽으로 향했던 고선지(高仙芝, ? ~ 755)와 그 일행은 당나라 실크로드 개척의 중심이 됐다. 남쪽으로 내려간 상당수 사람들은 묘족(苗族)을 비롯한 남방의 소수민족과 어우러졌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이정기(李正己, 732~781), 고구려 유민으로 태어나 산동성 등주(登州)를 거쳐 치주(淄州, 현재의 치박)와 청주(淸州, 현재의 유방)에 정착하면서 절도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유민의 신분으로 당나라에서 가장 빨리 출세하는 방법이 군인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군인이 되어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는 중심이 됐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는 결국 절도사까지 됐다. 혼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 토벌군에 참여한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의 협력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토벌군의 중심은 아니었다. 부장으로 있으면서 주변의 신망을 얻었다. 그리고 큰 공을 세우며 지금의 유방 청주지역 절도사가 됐다. 당나라 중앙정부가 힘을 쓰지 못할 때에는 산동성의 더 큰 영역에서 정치 경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나라도 어사대부, 청주자사 등 그를 달래기 위한 여러 관직을 내렸다. 고구려 유민의 든든한 신뢰와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산동성과 가까운 한반도의 발해나 신라와의 통상에서 얻은 이익도 그를 성공으로 이끈 매우 소중한 자산이었다.
이정기 사후 그 후손들이 산동성의 강력한 세력으로 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나친 그들의 욕심은 멸망을 재촉했다. 훗날 고구려를 재평가하는 사람들은 서역을 개척한 고선지보다 이정기를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당나라에서 그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산동사범대 한국학연구소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으로 이런 산동성의 기본자료를 부현지(府縣志)에서 찾는 것은 그래서 의미 있다.
/김덕균 중국산동사범대학 한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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