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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 북-칼럼니스트 |
시내 카페에 앉아 방금 전 옆 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읽다가 주변을 살펴보니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는 얘기를 하고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딴 생각을 하고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다. 우리는 한 장소에서도 다층적인 관계의 끈에 매달려 있다. 어느 때는 끈이 나를 동여매거나 풀어 주기도 하지만, 내가 끈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끈이 나를 풀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끈은 세상과 접속하는 마음의 바깥이고, 몸의 안쪽이 된다.
끈은 사방으로 뻗어가고 누구에게나 아무 곳에서나 일상의 리듬에 따라 다채로운 수(繡)를 놓는다. 하루가 흘러감은 온몸으로 느끼는데 온 정신은 산만하기만 한 사월의 한 복판이다. 일상을 겪어내는 시선의 결을 잇고 정리된 초점을 맞추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맥없이 부릅뜬 아파트 CCTV처럼 요즘 내 일상은 무엇 하나 마음에 간곡히 담을 수 없어 마음의 괄약근을 놓아버린 헝클어진 마음의 끈에 다름 아니다.
이런 때 스스로가 우연과 필연의 흐름에 의해 연결되는 시간의 끈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일상은 더욱 힘들어진다. 나는 왜 과거를 지나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예단하는 나를 믿지 못하는 걸까. 스스로를 의심하고 믿지 못하면 괜찮지 않다. 결국 나의 시간의 끈을 부여잡고 흔드는 건 나뿐이기에. 시간의 끈은 나의 몸을 옥죄고, 닫힌 마음의 문을 허허롭게 풀어 놓는다. 이런 가난한 마음의 끈이 우리들의 일상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때 팽팽하게 나를 옥죄거나 풀어낸 가난한 마음과 단절된 시간의 끈을 느긋하게 숨죽이기 위해선 멈춤과 머무름의 끈을 마련해야 한다. 멈춤은 끊어내는 일(stop)이 아니라 머무르는 일(stay)이다. 머무르라는 명령은 멈추라는 게 아니다. 머무른 상태에서 계속 자라기, 멈춤을 머금은 채 성장으로 이끄는 힘(끈)이다. 멈춤 다음에 오는 변화는 더 나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세우며 달라지는 삶이다. 그렇게 멈춤의 끈에는 기대와 고요, 긴장과 유연함이 고루 들어 있다.
쏟아지는 졸음에 잠시 책을 내려놓은 그 몽롱한 그 상태, 그런 현실 속에서 꿈같은 유토피아를 찾아서 멈춰 머무르는 상태가 좋은 삶으로 이끄는 끈이 아닐까. 보다 나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이나 곱씹으며 머리를 긁적이기만 할 일이 아니다. 이럴 땐 이 곳이란 공간을 저곳이란 장소로 슬며시 소풍(逍風)을 떠나 볼 일이다. 어릴 적 매 학기마다 찾아와 가슴 설레게 했던 '소풍'을. 내 삶 속 일상의 소풍은 언제였던가?
한자를 찾아보니 소풍은 '노닐 소(逍)'에 '바람 풍(風)'자를 쓴다. 지문을 남기지 않는 바람의 손처럼, 관계의 끈을 놓아버리고 하릴없이 세상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다 돌아오는 일이 소풍이다. 들인 돈만큼 왠지 본전을 뽑아야 할 것 같은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일이 아니다. 예기치 않게 나를 놓고 나를 잊으며 나로 가득한 뜻밖의 웃음의 끈을 몸에 감고 돌아오는 게 소풍이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소풍의 끈을 잡아 당겨보자. 주위를 둘러보면 죄다 바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멈춰 세워, 마실(근처에 사는 이웃에 놀러가는 일) 보다 조금 무거운 소풍에 나서보자. 후유증과 추억, 피로나 여흥과 같은 별다른 것을 남기지 않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람 냄새 정도를 머리카락에 묻혀오는 일말이다. 이렇듯 소풍은 잠시 멈춰 쉰 나에게 주는 몸과 마음의 선물이다.
시절의 끈인 봄날이 가고 있다. 낡아가는 사실과 잊혀 진 진실 중에 무엇이 더 옳고 나쁜 끈인지… 어떤 일의 상태도 모르면서 제대로 된 일을 꾸리기도 전에 왜 서툰 말(話) 끈을 휘두르는지… 진짜 좋은 일상의 끈은 어디에 매여 있는지… 세상만사 셀 수 없을 만큼의 끈으로 엉켜있지만 순리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진 않는다. 그렇지만 잠시 멈춰 서서 봄 소풍이란 끈을 일상에 매어보자. 봄 뒤에는 반드시 여름의 끈이 매여져야 한다. <김충일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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