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위선 또는 가식은 싫어하지 않는가? 적어도 다른 사람의 그런 행태는 터부시하며 살아온듯하다. 어느 조직에서도 배척 받기 일쑤다. 근자의 상황은 어떠한가? 오히려 환호하고 떠받드는 실정이다. 나라에 주인이 없기 때문이요, 스스로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김종원의 세계철학 전집 중 <나의 현재만이 나의 유일한 진실이다>에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한 사람이 가진 인생의 의미는 그 사람이 가진 책임의 크기와 비례한다." 인생의 의미뿐인가? 자유나 권한 역시 책임의 크기에 비례한다. 책에서는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성장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책임지는 만큼 성장한다는 말은 책임의 크기만큼 세상이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인식하지 못하면 준비도 불가하다. 활동 범위의 변화, 크기, 위치에 걸 맞는 의식과 준비가 있어야 한다. 모 여고 교장이 된 시인이 말했다. "이제야 사도가 보인다." 평교사라고 사도를 모를 리 없다. 수업에만 집중해왔다는 성찰로 들렸다. 교육이 자기 전공과목 가르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교육전반에 걸친 전문성은 물론, 교사조직 관리, 학생의 진로와 품행 지도, 가정 및 사회와의 협력, 행정도 뒷받침해야 한다. 책임감의 무게 또는 크기를 새롭게 인식했다는 표현 아닐까? 아는 게 없어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위선적 행태를 보이는 게 보통이다. 과오나 부족함을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순수하기 때문에 한 겸손의 말로 들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문인은 끼리끼리 모여 '합평회'란 것을 한다. 상호평가와 성찰의 시간이다. 제아무리 탁월한 작품도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에 가까운 경우라도 얼마든지 견해는 다를 수 있다. 지나치다 보면 기분이 상하거나 싸움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수용한다.
오래전, 김춘수 시인이 한 문학 강연에서 자신의 시 <꽃>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춘수 시 <꽃>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합평회에서 자신의 시에 대해 다른 작가가 지적 질을 한 것이다. 시인으로 자리를 굳혀가던 패기만만한 시인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강하게 자기주장을 펼쳤단다. 집에 와 생각하니 지적자의 의견이 더 좋더란다. 어느 구절인지 강연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다음은 <꽃>의 4연이다.
'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마지막 행에 나오는 '하나의 눈짓'이 발표 당시에는 '하나의 의미'였다 한다. 개정본을 내며 작가 스스로 수정하였다. 일연에 나오는 '하나의 몸짓'은 무의미한 카오스 또는 파동의 상징이다. '눈짓'은 상호인식과 존재의미가 된다. 시론에 밝지 않은 사람 눈에도 일연의 대구와 상징으로서 훨씬 자연스러워 보인다.
시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통의 소중함, 대중 앞에서 고백하는 그 순수한 태도와 진솔함이 놀라웠다. 우리는 얼마나 순수하고 진솔해질 수 있는가?
누구나 자기의 활동 범주가 있다. 거기에 걸맞도록 준비하고 처신해야 한다. 준비하지 않으면 변화에 적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 변화를 도모할 수 없다. 순수하지 않으면 바람직한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진솔한 것보다 강한 것은 없다. 인간적인 매력 또한 위세나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솔함에서 나온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 |
양동길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