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숭현서원 춘계제향을 올리는 날이다.
필자는 진잠향교에서 활약하고 있는 양완석 장의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서원에 들어서니 문화해설사 편금순, 정미향, 강완식 씨가 우리를 맞아 해설해 주었다.
편금순 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대전 유성구에 있는 숭현서원(崇賢書院)은 회덕의 충절지사인 김정, 정광필, 송인수 등 여덟 분의 명현을 모시는 사우로, 유학 업적을 남긴 옛 성현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16세기 후반 창건되어 임란 후 조정에서 '숭현'이라 사액되었다 한다. 그런데 마침 이날이 숭현서원 춘계 제향을 올리는 날이라 원장이면서 초헌을 하신 임덕순, 아헌에 권태희, 종헌에 송용길, 나기선, 강주성 등 유림들과 세종에서 왔다는 최현금, 신용숙, 석명옥 등 시민 200여 명이 모여 제향을 올렸다.
![]() |
숭현서원 춘계 제관들 모습 |
문화해설사 강완식 씨의 해설에 의하면, 이곳에 세워진 '숭현서원지(崇賢書院址)'에서는 정광필(鄭光弼)·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김장생(金長生)·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시직(李時稷)·송시영(宋時榮) 등 8인을 제향(祭享)하였다고 한다.
숭현서원은 처음 회덕(懷德) 용두록(龍頭麓)(현 대전광역시 중구 용문동)에 창건되었으나 임란 때 병화를 입어 소실되었다. 그리고 1609년(광해군 1) 유생 송남수(宋?壽)가 향유(鄕儒)를 이끌고 회덕현의 서쪽, 지금의 원촌동에 옮겨지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정광필·김정·송인수 3인만 제향하여 삼현서원(三賢書院)이라 불렀고, 그 해에 이시직(李時稷) 등 유생들이 사액을 건의하여 '숭현(崇賢)'의 액호(額號)가 내려졌으며, 1646년에 김장생을 추향(追享)하였고, 1681년에 송준길, 1695년에는 송시열을 추향하였다 한다.
송준길을 추향하기 전인 1658년에는 별묘(別廟)를 세워 병자호란 때 순절한 이시직과 송시영을 제향하였는데, 이렇게 8인을 제향하므로 팔현묘(八賢廟)로 호칭되기도 하였으며 1667년에는 별묘에 제향되었던 이시직·송시영을 서원 본당에 올려 동서(東西)로 배향(配享)하였다 한다.
제향 위차(位次)는 동벽 1위에 정광필, 서벽 1위 김정, 동벽 2위 송인수, 서벽 2위 김장생, 동벽 3위 송준길, 동벽 4위 송시열, 동벽 5위 이시직, 동벽 6위 송시영 순으로 배치되었으며, 숭현서원은 창건에서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회덕의 유력 사족인 은진송씨가 깊이 관련되었고,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고 한다.
양완석 장의는 필자를 '묘정비'가 세워진 곳으로 안내하였다. '묘정비'는 숭현서원의 내력을 적은 비로 1625년 상촌 신흠이 짓고, 1667년 우암 송시열이 덧붙인 글을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위에 쓰인 '회덕현'이란 글자는 전서체로 가히 자랑할만한 글 솜씨라 하였다.
![]() |
숭현서원에 세워진 묘정비 |
그 후손들도 물론 이곳을 다녀갔으리라 본다.
이런 문화재와 기록물을 봄으로써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양완석 장의를 따라 향교를 찾게 되고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을 갖는다.
김용복/평론가
![]() |
김용복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