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일까지 123일이 걸린 12·3 비상계엄 사태는 "자유대한민국 재건"을 구실로 절차를 뭉개며 국회를 습격하는 장면을 온 국민에게 들켜버린 반헌법적 정치 사변이었다. 날벼락 맞듯 당한 그날 밤 이후의 극한 분열과 대립의 원죄는 가볍지 않다. 이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민주 역량이 취약한 정치 후진국으로 국제사회에 낙인찍힐 상황이었다. 민주주의 실패에서 나타난 헌법 능멸 현상을 빠르게 수습하고 정상화의 길을 걷는 국민은 위대하다.
그렇기에 주권자로서 숱한 물방울처럼 모이고 모여 대해를 이뤄 띄운 대한민국호(號)의 소중함을 더 잘 안다. 그 기함(旗艦, 플래그십)이 지나갈 흐트러진 물길을 바로잡아야 한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는, 순자(荀子) 시절의 군주나 백성관은 현시대와 괴리가 크지만 민본주의나 민주주의나 뿌리는 민(民)에 있다. 지금껏 차고 넘치게 학습했듯이 헌법 유린은 권력구조가 꼭 직접 원인은 아니었다. 복권 번호 찍듯 리더를 골라 헌법의 무게를 짊어질 신뢰할 만한 리더십이 되지 못한 탓이 그보다 컸다.
바로 이 점이 또한 나라와 경제를 한없이 불안하게 했다. 동맹이 '최악의 국가'라며 관세를 퍼붓고 '민감국가'로 거의 죄악시할 지경에 이르렀다. 대다수 기업이 'IMF' 파고보다 더한 경제위기 전망에 공감한다. 자영업자는 줄폐업하고 지역경제는 성장 날개가 꺾여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주홍글자를 지우는 데는 '대한민국 리스크 없음'을 보여주는 일 이상은 없다. 민주적 절차에 따른 주권자 '뜻'일 수밖에 없는 헌재 선고가 원하는 결과와 다를지라도 거부하지 않는 자세가 주인 된 국민의 호응법이다.
관조 또는 피신하거나 반성을 촉구하거나 맞서 싸우거나 그건 개인 자유 영역이다. 그러나 사회 갈등을 부각한 '시위 관광' 상품까지 등장해 호기심의 대상이 됐던 건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다. 나의 분노만 정당하다는 위험한 갈등과 사회적 긴장을 풀고 둘로 쪼개진 심리적 내전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 힘의 논리로 국민을 정쟁 도구화하는 정치권, 집단여당 지위를 잃은 국민의힘이나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 다른 정당들도 성찰이 필요하다. 자기통제와 절제를 잃는다면 언제든 역사의 배신행위가 되고 만다. 비틀거리는 한국 민주주의를 살린 헌법을 지키고 우리 자신을 똑바로 세우기 위한 가치는 소중하다. 그 과업 완수에 국민이 응답할 차례다. 국가적 위기 수습 과정에서 아우르고 포용할 충청권 역할론도 커질 수밖에 없다.
다시 대·한·민·국이다. 절대다수의 양식 있는 국민의 열정으로 종이부시(終而復始), 즉 '끝난 자리에서' 헌정질서를 되찾고 실종된 협치와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할 때가 왔다. 절제의 의지와 제도적 자제 속에 '서울의 밤'을 온전히 마감하는 순간, 새벽녘 태양을 한몸 가득 품은 아침은 온다.
모든 권리는 의무를 수반한다. 지속성과 가치를 지닌 자유는 책임을 동반한다. 60일 이내로 갑자기 닥친 대선을 잘 치러 허깨비 대통령과 꼭두각시 십상시들이 함부로 날뛰게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그릇이 '권력'이라는 유혹을 담을 용도일 수는 없다. 상생과 탈이념·탈진영의 큰 정치를 담아낼 그릇이 필요하다. 다양성을 띠면서도 가지런한 민주주의, 지방시대의 새 토양에 국력과 국격 회복의 씨앗을 신실한 마음으로 뿌려야만 모두 승자가 된다. 지긋지긋한 탄핵의 장막을 걷고 화합하자. 국가적·역사적 한 페이지를 또 넘기며 국민통합으로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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