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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사무소를 퇴직하고 산불감시원으로 여전히 산을 지키는 조성열 씨가 계룡산성 조사 때 모은 탁본과 중도일보가 기탁한 기와편을 보이고 있다. (사진=임병안 기자) |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만난 조성열 씨는 계룡산에서 산성을 처음 발견해 50m 줄자로 성벽을 재어가며 실측하고 사학계에 이를 처음 보고한 주인공이다. 1977년 충남도 소속의 계룡산사무소때 국립공원 지키는 일을 시작해 정년을 마치고 지금은 산불 감시요원으로 계룡산을 지키는 중으로 48년째 산으로 출근한다. 그는 연천봉 아래 경사지에서 돌이 무너진 흔적을 보고 이곳에 산성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관련 대학을 찾아가고 공주시청과 충남도청을 방문해 고대 석축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고려부터 조선까지 각종 문헌과 지리지에 계룡산이 수없이 등장해도 산성에 대한 기록은 없는 터라 전공 교수와 관공서에서도 믿지 않았다.
조성열 씨는 1992년 동료 2명과 합세해 쉬는 날 GPS가 없던 시절 50m 줄자를 이용해 산성 둘레를 재기 시작해 사흘 만에 실측을 완료했다. 그때 그의 기록으로는 산성의 둘레는 5㎞였고, 현재 첨단 GPS로 실측한 계룡산성 너비는 4.8㎞다. 그는 등산로에서 기와편을 보일 때마다 주워서 묵으로 탁본을 떠 글씨를 해독하고 문양의 특징을 조사했다. 높이 5m에 폭 3m에 이르는 산성이 연천봉과 문필봉, 관음봉, 쌀개봉(830m)을 거쳐 해발 425m 지점까지 연결돼 마름모꼴의 형태였음을 알았으나, 언제 조성하고 산성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08년 초파일이었던 5월 12일 연천봉 등운암에서 내려오는 길에 글씨가 새겨진 깨진 기와를 발견하는데 '계룡산성 방호별감(鷄龍山 防護別監)'이라고 쓰여 있었다. 방호별감은 고려 후기 왜(倭)와 몽고군 침략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지역민을 규합하고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다. 계룡산에서 발견된 기와는 문헌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방호별감의 실체를 증명한 최초의 고고학 자료다.
조성열 씨는 "가정을 이뤄 집도 장만하고 아이도 생겼을 때도 감격스러웠는데, 깨진 기와에서 계룡산성방호별감을 발견했을 때 드디어 산성의 이름과 시원을 찾게 됐다는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이때부터 계룡산성이라는 게 확실해졌고, 고려 때 대몽항쟁 목적으로 축조되었음이 규명되었다. 조 씨는 2013년 공주시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함으로써 공산성만 알던 공주시에서 그보다 2배 규모의 계룡산성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가 발견한 기와편과 유물은 대전 수통골에 있는 계룡산국립공원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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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 국원문화재연구원 부원장 |
김호준 부원장은 중도일보와 통화에서 "몽고항쟁기에 축성된 것은 확실하고 조선 후기의 축조양식도 관찰되어 여러 시대에 축조되고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라며 "산성 안에 건물지를 발굴 조사하면 왜구의 침입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충남 일원의 전황과 양민의 피난을 이해하는 자료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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