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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윤. 대전대 명예교수 건축가 |
알프스산맥의 산언저리에 자리한 가톨릭 봉쇄수도원 사르트뢰즈 수도원의 침묵이 새삼 그리운 것은 소란을 단지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 자체의 소중함 때문이다. 프랑스 알프스 그르노불의 사르트뢰즈 수도원은 11세기에 카르투지오 수도회에서 건립한 봉쇄수도원으로 겉으론 움직임이 없는 그야말로 음을 소거한 무음의 사회이고 세상에 열리지 않은 심산의 비소이다. 이 침묵에 쉽사리 다가가긴 어렵지만 또 하나의 신비는 오직 수사들만의 천년 비법으로 제조한 리큐어 와인이 세상과 소통하고 있어 더욱 그 비밀의 문에 귀를 기울이게도 된다. 그 맛은 쉽지 않으며 신비롭고 그 경지를 터득하기엔 깊이가 너무 깊어 소통하긴 쉽지 않다. 세상에 알려진 바 없는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감히 흉내 내기도 어려운 특별함은 백 가지가 넘는 짙은 알프스 산중 허브 들의 합창으로 비교 불가한 신비감을 깊게 한다.
상상하기 어려운 건축의 침묵과 무거운 수도원의 모습이 아주 잠시 영상으로 제작되어 놀라웠다. 필립 그로닝 감독은 16년 동안의 오랜 기다림으로 결국 수도원의 응답을 얻어냈고 무겁게 입을 닫은 채 수도원의 침묵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갔다. '그곳에 하나님은 없었다' 라는 열왕기상 19장으로 시작하는 영화 '위대한 침묵' 은 천년의 시간을 긴 공백으로 수도원의 문을 열었고 깊고 어두운 수도원의 빛과 그림자가 미니말 영상에 담겨 세상으로 나왔다. 수사들의 머리까지 덮은 수도복의 움직임과 건축의 무채색 담백함이 아무런 영상의 치장 없이 그대로 나타났다. 숨을 멈추게 하는 공백의 도시에 드리운 침묵 그 자체가 교훈이고 종교적 깨달음의 무한경지를 드러낸다. 수도원 공간 안에 들리는 소리는 대지가 움직이며 내쉬는 숨소리 같고 그들의 긴 호흡도 자연과 어우러진 생명의 소리처럼 부드러우며 깊은 심연의 또 다른 자아를 부르는 일깨움으로 공간에 퍼진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의 초성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도시와 건축의 소음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생의 현실로 치닫는다. 근대의 문이 열리는 비엔나의 황금 같은 '벨에포크(아름다운 시대)' 시간, 고요하지만 강한 건축가 '아돌프 로스'의 메시지 '침묵 속으로'는 진정성을 잃은 세상의 귀머거리들에게 외침의 건축으로 강렬하게 펼쳐졌었다. 사르트뢰즈의 침묵처럼 장식 없는 미니말의 세상을 알린 그의 건축은 침묵 그 자체로 건축의 진정함을 내 보인 것이다.
'순살 아파트' 라는 어이없이 비겁하고 안타까운 현실이 우릴 부끄럽게 하고 있고 거센 비난이 뒤따르고 있다. 50 여년 전 영국은 한 아파트 붕괴의 치욕을 겪은 다음 진정성 있는 건축으로 거듭나며 다시는 이런 굉음이 들리지 않는 진중함을 보였다. 그들의 신도시들은 높은 스카이라인 대신 숲과 물이 가까운 저층의 집합 주거를 택했고 전원도시의 꿈을 실현하기도 했다. 우리의 신도시도 시작은 전원도시가 꿈이었지만 하늘을 향한 도시 만들기의 유혹을 이겨내진 못했다. 빼곡히 채워진 도시 속 상처 난 건축이 진통하듯 장삿속 유사 전원주거가 늘며 그 소음이 우릴 힘들게 하는 부담과 아쉬움도 커가고 꿈처럼 자연이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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