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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정 다정중 보건교사. 사진=시교육청 제공. |
'똑똑'. 적막을 깨고 보건실 문이 열립니다. 문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사람은 희연(가명)입니다.
희연과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이 쏟아집니다. '기특하다. 장하다.' 품에 안긴 희연의 등을 연신 토닥입니다. 희연의 뒤에 선 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맺힙니다. 어머니께 달려가 손을 맞잡습니다.
희연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이유 없는 사지 근육경련에 시달렸습니다.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았지만,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불안과 긴장이 원인일 수 있다고 하여 스트레스를 줄이고 마음을 편안히 하려 노력했지만, 증상은 나날이 심해져 하루에도 서너 번씩 경련으로 보건실에 실려 왔습니다.
원인도 모르고 약도 없는 질병을 앓으며 꿈을 포기한 아이가 느끼는 막막함, 시도 때도 없이 쓰러질 때마다 도와주는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냉기 가득한 집안에서 느끼는 불안. 10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큰 힘듦을 버텨내며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다잡는 희연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상담 공부를 시작하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교육부의 마음 챙김 동아리 활동으로 칭찬 일기, 긍정 언어 사용 캠페인 활동을 하며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썼습니다.
보건실에는 이송을 위한 휠체어와 깨끗하고 폭신한 침구, 따뜻한 차와 잔잔한 음악, 아로마 오일로 만든 스프레이를 준비했습니다. 담임교사는 관계중심 생활교육을 통해 친구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으며, 상담교사는 언제나 상담실의 문을 활짝 열어 아이를 맞아 주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쓰러졌을 때 다치지 않도록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고 희연의 교실을 보건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배정했습니다.
희연의 근육경련은 발병 1년 후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눈인사만 나누고 지나쳤습니다. "요즘은 괜찮니?"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간 부정이라도 타서 다시 경련이 시작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졸업식 전날, 희연은 곱게 쓴 손 편지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제가 가장 힘들고 바닥이라고 생각할 때조차도 저를 세상에서 최고의 아이로 대해주셨어요.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 덕분에 버텼고 단단해질 수 있었어요. 선생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희연은 모릅니다. 자신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요. 희연이야말로 저를 세상에서 최고의 보건교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았음에도 목소리, 눈빛, 손길만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희연에게서 앞으로 남은 교직 생활을 이어갈 힘을 얻었습니다. 10년 차 보건교사지만 여전히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지 몰랐던 저는 희연 덕분에 보건교사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더 나은 보건교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희연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냥 그럴 때도 있는 거야. 네가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말이야. 그럴 땐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면 돼.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때가 되면 학교에 가고 때가 되면 잠을 자고. 그렇게 하루 이틀 살아가다 보면 몸도 마음도 쑥 자라 어제의 아픔이 별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날이 올 거야. 너의 곁에는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하는 부모님, 친구, 선생님이 있단다. 그러니 힘들 땐 그들에게 기대 버텨보자. 기억하렴, 너는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한, 세상에서 최고의 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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