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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열 수필가 |
대지는 이렇게 봄옷으로 갈아입는데 우리를 짓누르는 공기는 여전히 추위에 머무르게 한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울린다. 길거리 상가에는 임대라는 딱지도 많이 보인다. 어떻든 버티는 수밖에 없다. 겨울의 혹한을 견뎌내고 봄이 소생한 것처럼.
작년에 박경리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여류소설가 실비 제르맹은 독자와의 대담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말을 인용했다. "써라, 그래야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읽어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읽는 게 책만이 아니다. 만물이 살아있는 책이다. 자연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살이는 듣보는 과정과 같다. 세상의 소리를 풍경소리라고 한다. 우리는 매일 대지와 인간의 소리를 듣는다. 대지는 끊임없이 생성·변화하는 공간이다. 봄·여름·가을·겨울로 바뀔 때마다 모습과 소리로 감정의 메아리를 울리게 한다. 하지만 세상살이의 분주함에 빠져 대지의 순환에 무관심하면 자연이 내는 소리를 눈치채지 못한다. 이 봄날, 저 꽃망울이 툭 터지는 소리는 천지를 일깨우는 몸짓이지만 문명의 소리에 갇힌 현대인들은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글을 쓴다는 것을 번역이라고 했다. 내 안에서 웅성거리는 생각과 감정을 살펴 언어로 물결을 내는 뜻이다. 옛날에는 종이가 귀하고 붓으로 글을 써야 해 생각을 조각하듯 글을 새겼다. 지금은 쓰기에 너무나 접근이 쉽다. 또한 속도가 생명인 세상이라 생각을 담금질하여 번역하지 못한다. 그러니 생명의 순환이 없는 가상공간에는 자극적인 글들만 넘쳐나 세상의 시비가 가라앉을 새가 없다.
봄의 전령사인 매화나무가 암향暗香을 퍼트릴 채비를 마쳤다. 곧이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벚꽃은 눈을 위한 꽃이다. 인생의 화려함과 무상함을 같이 느낄 수 있다. 활짝 피었다가 어느 순간 바람에 훌훌 날리며 꽃비로 내린다. 벚꽃의 낙화를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사람의 걸음걸이는 벚꽃이 땅에 떨어지는 속도보다 20배 남짓 빠르다. 우리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봄의 시간 밖으로 달아나고 있다.
인생 100년을 하루의 시간 단위로 나타내면 36,500일이다. 무슨 일을 한다고 시간을 보냈는지 지난날을 돌아보면 기억의 우듬지에 걸려있는 한 조각 구름일 뿐이다. 100살까지 산다고 하면 긴 듯한데 하루로 놓고 보면 왠지 짧다는 생각이 든다. 일 년이라는 단위는 길고 하루는 금방 지나가기에 심리적 시간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 테다.
봄은 추위라는 질곡을 이겨야 찾아오는 계절이다. 영어로는 봄을 'Spring'이라 하며 응축되어 뻗치는 힘을 상징한다. 봄의 소리는 생명을 깨운다. 살아있음은 계절의 변화에 동참하는 것, 겨우내 조심조심 지켜왔던 몸의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쭉 펼쳐보자. 산으로 들로 물가로 가서 봄 내음을 맡아보자. 봄바람은 개구리울음 같은 자유의 바람이고 황소 울음 같은 정겨운 바람이다. 봄바람에 묻어 전혀 오는 감정은 그리움이고 속삭임이고 재잘거림이고 부드러움이다.
이 봄날, 그대는 어떤 소리를 들을 것인가. 봄날은 생명의 약동과 생명의 소리를 들려주는 시간이다.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기보단 지금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봄의 찬가를 들어보자. 봄이 왔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 떨림은 나이 잊은 청춘의 축복일 것이다. 바람이 가슴의 빈틈으로 스며든다. 그렇다! 달뜨는 봄이다. /김태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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