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송복섭 교수 |
우리나라에서도 법원 판결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고인이 재판의 부조리함과 법관의 완고한 태도에 분개해 석궁으로 판사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 실화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재판과정이 얼마나 곤란하고 힘들면 예로부터 다툼을 법정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 생겼겠느냐만, 여전히 시시비비는 결국 법정에서 다뤄진다. 복잡한 실체와 은밀한 내막을 어찌 법관이 심문조서와 자료만을 가지고 정확하게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마는 제도는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법관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길 수 없다는 생각에 배심원 제도를 운용한다. 그런데도 미국 드라마에는 배심원들의 성향을 분석해 동정을 유도하는 전략과 막후에서 거래하는 시도들도 속속 등장한다.
좀처럼 법정에 서는 일이 없는 대부분 국민은 재판이 어찌 진행되는지 알 일이 없다. 그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셈이다. 다만 모든 기소와 판결에 대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는 바람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난 몇 달 동안 진행된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변론은 재판과정에 대한 믿음에 의구심을 키우게 했다. 진실과 실체를 확인한다기보다는 기대하는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 희한한 논지를 펴는가 하면, 증인을 윽박지르고 미비한 법적 절차를 문제로 삼는 모습을 거의 생중계로 지켜봤으니 말이다. 듣다 보면 모두가 그럴싸한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진실을 밝히는 일과는 동떨어진 논리 대결을 벌이는 드라마 속 장면을 지켜보는 느낌이다. 이기기 위해 열심히 싸우는 율사들의 모습이 애처롭고 억지를 강변하는 태도는 민망하기까지 하다.
어느 법조인은 한 칼럼에서 직업인으로 십수 년 그리 살다 보면 사람 자체가 그렇게 변하는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율사들은 일반인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법정이 원래 그런 곳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그전까지는 몰랐던 실체를 국민 다수가 이번 기회에 적나라하게 지켜봤다는 데 고민이 있다. 더는 법정이 정의를 구현하는 곳이 아니라 공감하기 어려운 논리로 율사들끼리 싸우는 전쟁터이고 진실보다는 승리와 그에 따른 보상이 관건인가 하는 이미지를 심어 줬다면, 선량한 국민은 앞으로 어디에 정의를 의탁할 것인가?
한 가지 기대하는 구석이 있긴 하다. 양심과 역사적인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어느 순간 법정에선 졌다 하더라도 의문을 남긴 사건은 나중에 누군가가 다시 조명한다는 사실이다. 탐사 보도가 됐든 영화가 됐든 세월이 흘러 다시금 사건을 되돌아보고 억울한 피해자뿐만 아니라 영리한 논리로 억울한 죄인을 만든 율사들도 함께 평가한다는 것이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가 소설 속 가상 인물이 아니라 현실의 율사라면 어땠을까? 고액의 수임료는 억울한 의뢰인을 구하고자 애쓰던 양심과 바꾼 평생의 형벌이 되지 않을까?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한 변호사가 되뇌던 말이 생각났다. 불쑥불쑥 그만두고 싶은 충동이 이는 참 힘든 직업이라고……. 남들에게는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일자리일 텐데, 그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었을까?
/송복섭 한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