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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민족은 한민족입니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저에게 통일은 목적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세계를 지도하는 자격을 갖추기 위한 과정입니다. 현재 시대를 아시아 태평양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사실은 전 세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죠. 태평양,인도양 바다를 중심으로 미국,중국,러시아,일본,대한민국,아세안 인도 등 핫한 나라가 다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중심에 동북아시아가 있습니다.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가 있죠. 일본은 지는 해고, 지금 세계는 다음 세대를 놓고 한국과 중국이 겨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혼란스럽죠. 안정되려면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 중심이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심의 자격을 갖추는 게 통일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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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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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오래되셨네요.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저를 만든 8할이 독서입니다. 1975년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독서에 열중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000권의 책을 봤습니다. 호계초등학교,우성중학교,공주농업고등학교에 있는 책을 다 보고 공주의 박문서점, 대전의 부여서점, 서울 청계천의 헌책방 거리를 순례하며 마음의 양식을 마련했습니다. 우성중학교 2학년 시절인 1977년 새마을 잡지를 읽다가 ‘온실’을 보고 해보고 싶다 생각해서 아버님께 대나무를 구해달라고 해서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땅을 파서 그 속에 짚을 넣고 겨우내 그 짚이 썩으면서 열이 나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그 열로 고추 모를 키워서 봄에 밭에다가 심으면 고추도 많이 달리고,고추를 일찍 수확하니까 값도 더 받고 하는데 두 해는 실패하고 3년 되는 1979년에 성공했습니다. 공주지역에서는 제가 처음 이런 성과를 내서 상도 많이 받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유고가 발생했죠. 3년 동안 ‘인간 상록수’로 살면서 제가 살던 마을을 파라다이스로 만들 자신이 있었고 실적도 있었는데, 대통령의 유고로 한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더군요. 그 때 충격을 받고 내 동네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나라를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 ‘아! 통일이 되어야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마음먹고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46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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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중학교 다닐 때 제가 공부를 좀 했습니다. 책을 보면서도 전교 10등 안에는 꼭 들었지요. 선생님이 당시 공주사대부고와 공주고 원서를 써놓으셨는데, 저는 농촌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있어 3일 단식을 하며 투쟁한 끝에 공주농고 농업기계과를 갔고, 1982년 충남대학교 농업기계과로 진학했습니다. 그 해 전국 수석은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장관이었고 저는 농고생 출신 중에 전국 수석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부르시더니 ‘서울대 갈래, 충남대 갈래?’ 이렇게 물으셨는데 저는 충남대를 가겠다고 대답했죠. 농고생 중 장학생으로 입학한 경우는 제가 유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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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대전에 오니 운동권 파워가 엄청났죠. 당시 대학가는 전대협이 장악하고 있었고, 충남대를 비롯한 몇 개 대학만 남아 있었죠. 1987년 전대협 1차 대회, 1988년 전대협 2차 대회, 1989년 전대협 3차 대회를 충남대에서 개최했습니다. 물론 지리적으로 중간이라는 점도 있지만 충남대까지 전대협이 장악하면 대학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정권을 뒤엎을 수 있다는 그런 계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국대 등 열 개 학교 후배들을 모아서 ‘중부권청년학우연합(중청련)’, 순수학생운동협의회’를 만들어서 전대협과 맞서서 싸웠습니다. 결국 1991년 전대협이 한총련으로 분화되며 대전,충남지역을 지켜냈습니다. 그 때 저하고 같이 했던 후배들이 300명 정도 되었는데 계백장군 5천 결사대처럼 똘똘 뭉쳐 있었죠. 전대협은 이념으로, 중청련은 인간적 유대관계로 뭉쳐진 집단입니다. 요즘 어디서도 그런 치열한 싸움은 쉽지 않죠.
-일본으로 가셔서 오랜 동안 활동하신 줄 압니다. 이 때 이야기를 들려주실까요?
▲1994년 일본으로 갔습니다. 통일을 연구하다 보니 통일비용이 많이 들 것 같았습니다. 국민들에게 통일비용을 내라고 하면 저항이 있을 것 같았죠. 어차피 통일도 돈이 있어야 되는지라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해서 일본 오키나와로 갔습니다. 돈 없이 일본에 간 저는 일본에 도착하고 보니 수중에 70만 원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걸로는 한 달도 살 수 없는 그런 돈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열심히 해서 살아남았죠. 일례로 제가 김치를 열다섯 가지 종류를 담가서 팔았습니다.
일본 가서 1년 만에 재일민단 오키나와지부 사무국장 겸 부의장이 되고, ㈜서울무역상사, (주)세일여행사 오키나와지사, 호텔 산마린나하 등 3개 회사 대표를 맡아서 경영했습니다. 오키나와 중심 도시인 나하 인근 우라소에시 야후소라는 거리에 10평 정도의 한국 상품 전문가게를 열고 한국비디오, 라면, 김. 김치, 인삼차를 팔았습니다. 서울 무역가게를 열고 일년 후 주식회사로 변경했습니다. 당시 세일여행사는 업계 랭킹 3위안에 들어가는 대형 여행사였습니다. 특히 인바운드에서는 특수한 강자였습니다. 1996년 괌에서 대한항공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난 후 여행사들이 괌을 대체하는 여행지를 찾다가 오키나와로 연간 5000명을 보내주는 계약을 세일여행사와 맺었지요. 오키나와 슈리성에서 나하항으로 가다보면 아케보노 정에 산마린나하라는 호텔이 있었습니다. 주로 출장객들이 장기 투숙하던 호텔인데 1995년부터 임대 경영을 시작했지요. 일본의 개인 수입을 타깃으로 해서 만든 일본 전용 소기업 수출대행 회사인 국제통신판매주식회사 상무로도 일했습니다.
오키나와에는 2차대전 때 징용으로 끌려간 2만 여명의 조선인과 300명의 종군위안부가 있었고 제가 갔을 때도 할머니들이 많이 살아계셨는데 김치를 가져다 드리니 펑펑 우시는 걸 보고,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2만 여 명중 1만 명은 한국으로 돌아오셨는데 1만 여명은 오키나와에서 희생되셔서 1975년 정부에서 오키나와 남부 이토만이라는 곳에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일본인들은 매 년 한 번씩 제사를 지내는데 한국인이 주도해서 지내는 위령제는 한 번도 없었다고 했어요. 수도 없이 가서 참배하면서 원수가 차려주는 제사가 맛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1995년 추석부터 제가 직접 제사를 지냈습니다. 3년간은 술, 떡, 과일, 과자 등 모든 제수를 한국에서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고등학교 후배들인 공주농고 농악부를 불러서 위령탑 앞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처음 3년은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비바람이 불어서 사람들이 제수를 붙잡고 지냈는데 4년 째부터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모두들 우리 선조의 한이 풀렸다 보다 생각했고, 현지 일본인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오키나와에서는 한국인의 위상이 참으로 높아졌습니다. 위령제를 지낸 3년 후 오키나와 고등학교가 고시엔에서 우승하는 기적이 벌어졌고, 에이펙(APEC) 회의가 오키나와에서 일부 개최되는 등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도 많은 활동들을 하셨지요?
▲예.(주)유네코 그룹 자회사인 빌더스관광개발주식회사는 제주도 개발을 위한 관광전문회사인데 여기서 상무이사로 일하면서 빌더스개발연구소를 통해 빌더스 포럼 활동도 같이 했습니다.
노사모 대전회장 나영환 사장이 뉴질랜드에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설립한 회사인 (주)보명에 기획실장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지요. 금광 채굴 회사였던 (주)영도광업에서도 상무이사로 일했습니다. 함초 일본 수출을 하던 (주)다사랑 함초코리아 해외사업부 이사도 했고, 국제로타리 3680지구 대전중앙클럽 회장도 했고, 국가보훈부 장관을 지낸 박승춘 장관이 만든 안보 교육을 위한 재단법인에 창립멤버로 참여해 (재)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 대전충남 사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국가보훈처의 나라사랑전문강사로도 오랫동안 활동하며 인기강사소리를 들었지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전중구협의회 자문위원도 역임했고, 통일교육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길림성 조선족자치주 용정시 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주)한림미래전략연구소 소장으로도 일했습니다. 흑룡강성 무역청장과도 교류하고 연길 용정시에 방문해 활동했고, (주)신창제지 설비를 인수하기 위한 SPC 글로벌케이앤티 주식회사 상무이사와 관리부분장도 맡았지요. 세인트미션대학교 대한민국학과 교수로 임용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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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민단의 정식명칭은 ‘재일민단’이고 당시에 50만 명 정도 회원이 있었죠. ‘조총련’은 ‘재일조선인총연합회’라고 부르고 20만 명 정도 있었습니다. 민단은 국적이 대한민국이고, 조총련은 국적이 북한입니다. 그래서 서로 만나지도 않고, 만나면 싸우고 그런 상황이었죠. 민단 사무국장이 되려면 국정원에서 신원조회를 하고 통일부에서 교육을 받아야 임명장이 나왔습니다.
한번은 전국 민단 사무국장 회의를 하는데 토론이 붙었습니다. 민단 단원의 자산이 얼마나 될까? 몇 시간의 토론 끝에 당시 대한민국 정부 예산의 10년 치를 자산으로 가지고 있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2,000년 초 정부 예산이 110조 원이었는데 민단 단원의 자산이 1,100조라는 거죠. 조총련까지 합하면 2,000조 원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당시 일본 경제의 15%를 교포 경제가 차지하고 있었고, 아마 지금도 그 비율은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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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들은 민단, 조총련 가릴 것 없이 엄청난 차별을 받습니다. 세금은 정말 많이 내는데 공무원이 될 수 없습니다. 투표도 못합니다. 그러니 사업밖에는 할 게 없죠. 특히 그중에 빠찡고가 있습니다. 일본 전국에 2만 개의 빠찡고가 있는데 그중에 1만4,000개를 우리 교포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민단계 7000개, 조총련계 7000개 등 사이좋게 나눠 가지고 있거든요. 나머지 7000개는 대만계, 일본계가 가지고 있는데, ‘빠찡고’라는 기계는 구슬을 쏘아서 핀에 맞추면 그걸 돈으로 바꿔주는 건데 문제는 그 핀을 조정하는 게 손이 섬세한 한국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빠찡고 사업을 장악하게 된 거죠.
한 업소당 하루 영업이익이 2,000만 원쯤 됩니다. 빠찡고는 365일 영업입니다. 그러면 2,000만 원 ×14,000개소 ×365일이면 매년 현금으로 102조 원의 돈이 벌리는 셈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일본 조총련에서 북한으로 현금이 매년 수조 원씩 들어갔습니다. 그런 사실은 제가 민단 사무국장을 해보았으니 누구보다 정확하게 압니다. 그래서 제가 교포들에게 제안했죠. 일본 정부에 세금 낼 돈으로 북한에 투자해서 북한을 발전시키는 통일자금으로 삼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포들이 세 가지를 말하더군요.
첫째,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 한 번 해보고 싶다. 둘째, 일본에서 지방참정권을 가지고 싶다. 셋째, 북한은 믿을 수 없으니 대한민국 정부가 보증한다면 1,000억 달러 정도는 금방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제안을 가지고 2003년에 김종필 총재를 만났더니 재단자본금 50억을 만들어 오라고 해서 지금까지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화갑 당시 민주당 총재한테도 찾아 갔는데 그 분은 솔직하게 말하더군요. 덩치가 너무 크고, 내가 박지원 씨 견제를 받고 있어서 힘들다며 프로젝트를 반환하셨습니다.
심대평 지사도 만나기로 했는데 그 날 도청 이전으로 급한 일이 생겨서 만남이 불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통일부 장관인 정동영 장관에게 보고서가 올라갔고 방북할 때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 장관이 북한에 제안한 것이 제 프로젝트의 5%인 50억 달러로, 북한에 200만 킬로와트의 전기를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불발되었습니다. 북한으로서는 국가의 기본에너지인 전기를 외부에서 받는다는 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같이 제안했던 재외동포 투표권이 2012년 법률이 통과되어 교포들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어 한 가지는 해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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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2년 9월 단동에서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서기가 보낸 김용 봉화무역 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 때 반응이 ‘정 선생, 이걸 우리가 할 수 있단 말이요? ”(이때 제안한 프로젝트 ‘재일교포 자금을 이용한 북한경제 발전방안과 평양올림픽 개최’) 하면서 “정 선생, 이것은 우리 위원장이 환장하게 좋아할 내용인데 덩치가 너무 커서 우리가 보고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정 선생이 10만 달러씩 두 번만 약품을 지원해주면 위원장을 독대시켜 주겠소. 거기서 이 제안을 하면 너무 좋아할 거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김정은 위원장의 꿈이 평양에서 국제 축구대회를 한번 개최하는 건데, 올림픽을 한다면 너무 좋아할거요” 라고 말했습니다.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폐막식 때 갑작스레 북한 3인방인 황병서,최룡해,김양건이 왔는데 당시 문체부에서 문공회 회장인 서종환 선배님을 통해 프로젝트를 달라고 연락이 와서 북한에서 가져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2017년 말 문재인 대통령 때 청와대에 평양올림픽 개최에 대해서 등기로 보냈더니 총무비서관실에서 취직을 원하느냐 해서 취직보다는 이 정책을 반영해달라 했더니 2018년 평양 갈 때 가지고 가서 2032 서울 평양 공동개최로 바꿔서 제안했습니다. 그해 12월 IOC에 남북이 공동으로 유치 신청을 했는데 후에 북한이 생각해 보니 공동개최는 재미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듯 싶습니다. 힘을 북한이 다 쓰고 과실은 남한이 다 따먹는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적극적이지 않아서 2021년 브리스번으로 결정되고, 2032올림픽 개최 꿈은 무산됐죠.
원래 올림픽 개최지 결정은 7년 전에 하는 게 룰인데 갑자기 11년 전에 결정을 하는 바람에 ‘2032서울·평양 하계 올림픽개최 민간추진위원회’조직을 하고 사무총장을 맡아서 준비하고 있던 저로서는 얼마나 허망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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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북한이 비핵화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저하고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인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입니다. 주 기자는 북한에 300억 달러 정도 주면 아마 비핵화 할거라고 방송에서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1000 억 달러를 주겠다는 프로젝트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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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는 예산이 650조 원인데 따 쓸 곳이 정해져 있는 예산이거든요. 그리고 미제의 식민지 남조선 정부라고 욕해 왔는데 쉽게 받을 수 있을까요. 북한에 남은 건 지금 딱 두 개입니다. 하나는 자존심, 또 하나는 핵입니다. 재일교포 자금, 얼마나 좋습니까? 동포가 외국 가서 설움 받으며 모은 돈을 조국의 현대화에 쓴다는 것은 명분이 좋죠. 이 자금은 UN 산하 특별 위원회를 만들어서 집행하면 됩니다. 저는 이 일을 준비하며 살아왔고 저 스스로 통일의 씨라고 생각하고 2,000번이 넘는 통일 특강을 통해 ‘통일의 씨’를 30만 명 넘게 심어왔습니다. 저는 이 씨들이 싹 트면 통일의 날이 온다고 믿고 삽니다.
대담, 정리 한성일 편집위원(국장) hansung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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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공주 출생. 호계초등학교,우성중학교,공주농업고등학교,충남대학교 농업기계공학과 졸업. 육군 5699부대 포병통신과 병장 전역.
전국교수학생신문기자, 재일민단 오키나와지부 사무국장 겸 부의장,㈜서울무역상사 대표이사,㈜세일여행사 오키나와 지사장,㈜호텔 산마린 나하 대표, 한일친섭협회 오키나와 회장,오키나와 한국인 위령탑 위령제 봉행 위원장,㈜유네코 상무이사,㈜빌더스관광개발주식회사 상무이사,㈜영도광업 상무이사,㈜다사랑 해외영업이사,㈜국제통신판매주식회사 상무이사, ㈜글로벌K&T 상무이사 겸 관리부문장, ㈜보령스마트 팜 상무이사, 재단법인 한국녹색산업개발원 신소재사업부 개발이사.
중국 연길 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산업단지 건설 기획실장, 재단법인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 대전·충남사무처장 겸 교수, 국가보훈처 나라사랑교수, 국가보훈처 보훈정책 자문위원, 국가민방위 재난안전교육원 자문위원 겸 교수,총리실 산하 미래재난 연구포럼 위원, 민주평통 자문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전국 20여 개 지자체 민방위 재난안전교육 교수, 2010년 문학공간 시무문 신인상 등단, 한국문협회원,대전문협회원,동시대동인,중도문학동인,국제로타리 3680지구 대전중앙클럽 07-08년도 회장, (사)새터민회 후원회장,북한이탈주민연합회 자문위원.대종교남북교류협력위원장 역임. 2018년 통일교육 유공 국무총리 표창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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