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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3·8민주의거 당시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에 폭행피해를 겪은 송병준 씨가 아들 송재헌 씨의 도움으로 외출하고 있다. (사진=임병안 기자) |
6일 오전 대전 유성구 수통골의 한 요양원에서 송병준 씨를 만났다. 그는 청력을 대부분 상실해 스케치북에 큰 글씨로 질문을 적으면 문장을 읽고 대화로써 대답했다. 그는 1960년 3월 8일 대전고 여느 학생들처럼 학교 운동장에 모여 함께 밖으로 나가자는 외침과 함께 공설운동장을 향해 나아갔다. 옆에 있는 친구의 팔을 걸어 스크럽을 짜기도 하고 때로는 뛰기도 하면서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인동의 어느 골목에 도달했을 때 친구들이 갑자기 빠르게 흩어지는 동안 그는 사정을 모르고 있다가 정복을 입은 경찰에 붙잡혔다.
송병준 씨는 "싸릿가지를 엮어서 세운 담장으로 가로막힌 골목에서 그곳을 벗어나려 담장 아래로 숨는데 경찰이 내 발을 잡고 잡아당겼고 그때부터 구둣발로 차인 거 같아"라며 "나는 바닥에 웅크린 채 구둣발로 마구 밟혔는데 그때 허리춤에 뼈를 다쳤는지 아야 아야 해"라고 왼손을 들어 왼쪽 허리춤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송 씨는 유성 본가를 떠나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대흥동에 있던 친형 집에서 함께 지내는 중이었는데, 3·8의거 당일 송 씨가 어떤 모습으로 귀가했는지 기억하는 증인이 한 명 있다. 충남대병원장을 지낸 송시헌 세종충남대병원 전문의는 중도일보와 통화에서 "그는 저의 삼촌이고 삼촌이 고등학교 다닐 때 저는 초등학생으로 같은 집에서 지냈는데 어느날 늦은 오후에 삼촌이 여러 사람에 부축을 받으며 집에 들어오는데 발을 딛지 못하고 질질 끌려서 들어오시던 게 너무 놀라서 뚜렷하게 기억된다"라며 "삼촌은 이후 한참을 앓아누웠고 학교 다니기 어려워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라고 설명했다.
대전에서 1960년 대전고와 대전상업고, 대전공업고, 보문고 등의 학생들이 민주의거를 일으켰을 때 경찰은 기마경찰을 출동시키고 지프차로 돌진해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다. 또 곤봉과 카빈총을 휘둘러 학생들을 폭행했는데 마침 도로 포장을 위해 가져다 놓은 검은색 콜타르를 뿌리기도 했다. 맞아서 머리에 피가 나거나 쫓기는 중 높은 곳에서 떨어져 부상자가 속출했으나, 드러내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에 스스로 요양하고 상처는 아문 것처럼 보였다. 송병준 씨는 3·8민주의거 이후 학교를 그만두려고 마음먹고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담임인 조남호 교사가 집에 찾아와 설득한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10년이 채 되지 않은 1970년 그는 정신질환 치료를 위해 폐쇄병동에 1년 가까이 입원했으며, 그때 허리 부상으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어려운 시간을 견뎠다. 그는 3·8민주의거 때 경찰 폭행 피해를 2019년에서야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고 김용재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이 주관해 참여세대 증언 기록집을 만들 때 처음 자신의 경험과 피해를 공개한 것이다.
아들 송재헌 씨는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담장 밖에 사람이 지나가며 담장 안을 본다고 느끼면 몽둥이를 들고 공격적으로 대응하셨고, 신분증 없이는 외출하지 않으시고 신분증을 꼭 손에 쥐고 다니셨다"라며 "집 안에서 불을 밝히지 않고 어둡게 지내셨고, 대문과 방문을 꼭 잠그고 지내셨는데 그때는 왜 그러실까 이해하지 못하다가 2019년 3·8민주의거 때 폭행당한 기억을 말씀하는 것을 듣고서야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으셨구나 이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국가보훈부는 최근 송병준 씨를 방문해 증언을 영상으로 기록했고,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에서도 '3·8민주의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구술 자료집에 그의 인터뷰를 담았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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