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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 북-칼럼니스트 |
오늘 만남의 까닭을 말하자면, 며칠 전 지인의 메일 속에서 읽은 '문향하마 지미정거'(聞香下馬 知味停車, 향기를 맡은 이는 말에서 내리고, 맛을 아는 이는 수레를 멈춘다)가 그것. 찾아간 음식점엔 '聞香下馬'란 현판이 걸려있다. 아! 그렇구나 '맛 집'에서 보자는 뜻이었나. 근데, 좀 의아하다. 음식의 향기는 코로 맡는 것 아닌가? 왜 귀로 향기를 맡는다는 의미로 聞(들을 문)자를 사용했을까?
문득 삼년 전 이때쯤 조식이 그의 초막인 산천재 뜨락에 심었던 남명매를 찾아가 만나본 인연과 생각하며 피는 꽃 탐매를 표현하는 '문향하마'가 떠오른다. 영문학자(김명렬)은 산문집 『문향』에서 저자의 외숙 옛 집에서 '문향루'라는 편액을 본 기억과 사색을 더듬는다. 오늘 만난 지인은 커피 못지않게 차를 즐기는 사람이나 향을 다루는 이들은 꽃향기를 맡는 게 아니라 듣는다라고 표현하며, 우롱차를 마실 때 주로 쓰는 좁고 길게 생긴 찻잔을 '문향배'라 이름 짓고 있음도 알려준다.
이렇듯 문향이란 말의 쓰임새나 속뜻은 참 깊고 넓은가 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추억이라든가 일상사까지도 문향의 감수성과 관찰을 거치면 의미 깊은 삶의 진실이나 각별한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앞으론 계단 한 쪽에 핀 할미꽃이나 아파트 작은 화단에 피어나는 목련이나 철쭉 같은 꽃들이 놀라지 않도록 알맞은 거리에서 꽃향기를 들어 볼 일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문향의 풍경을 그려낼까? 사유의 촉을 더듬거려 보면 무엇보다도 '배우는 일 자체에 대해 배우'려는 메타(meta)시선의 결핍의 삶이 아닌가 싶다. 즉 거울에 비친 자신과 늘 접하는 주변 세계 속 사물사이의 이면을 바라보며 또 다른 시선을 획득하기 위해 현상 너머를 성찰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의 부족함 말이다.
특히 언어세계에서 그러하다. '문향적인 태도와 초월적사고'를 지닌 이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몰라도 아는 척을 하거나, 알아도 침묵하거나, 아는 것을 가지고 '꼰대질'을 하지 않는다. 대신,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거나, 자신이 알 수 없는 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거나, 무지를 그저 맥없이 선언하기보다는 질문한다, 옳고 바른 질문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문향의 행위이며, 대상을 메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하다.
게다가 대상에 대한 감성적 문향과 복합적 시선은 앎의 한계를 예민하게 혼융(混融)시키면서 삶을 두 배로 살게 한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일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삶의 체험을 두 배로 늘여주듯이. 영화를 즐기면서 동시에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감상의 희로애락을 몇 배로 늘여주는 것처럼. 그러나 순수감각과 창의적 관점을 유지하는 일은 많은 심리적, 육체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고단한 일이다.
우리네 일상은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쳐야 하는 전쟁 같은 삶이기에 겪어내야 할 일은 무거운데 갈 길은 멀다. 그렇지만 우린 순간순간 삶의 고단한 책임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나는 언제 쯤 더 이상 거칠고 심란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 때 우리는 삶의 책임과 걱정을 면(免)한다는 기쁨을 내려놓고 면함을 '안다'는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란 삶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문향과 메타시선'의 노를 젖는 사공이 되고 볼 일이다.
다가온 새 봄 여기저기에서 꽃향기가 귓전에 들려온다. 흘러가는 시간의 가슴 속 깊은 상처도 누비진 삶도 오롯한 꽃향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문득 눈 속에서 녹아내리는 물소리의 맛도 음미할 수 있다. 감각의 순수와 생각의 예민함으로 누군가에게 꽃으로 다가 서보자.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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