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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우 남서울대학교 특임교수 |
그러나 이러한 명분 사회의 틀에 안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 틀에서 벗어나 고난을 겪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국가에 대한 반역과 같은 특정의 정치적 사건으로 왜곡된 것일 경우 그 피해는 치명적이었고 이를 감내해야 할 고통은 대를 이어 수십, 수백 년이 걸렸다. 염선재(念先齋) 순천김씨(1572~1633) 역시, 그런 고통과 회한을 안고 살았던 사람이다.
염선재는 절재(節齋) 김종서(1383~1453)의 7대 손녀다. 김종서는 세종대에는 '6진'을 개척하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했으며 단종 대에는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욕으로부터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단종을 지키려다가 1453년 계유정난으로 반역의 누명을 쓰고 처절한 죽임을 당했다. 이때 그의 직계 3족은 모두 참수되었고 구사일생으로 어린 손자 하나가 살아남아 혈통의 명맥을 유지해 신분을 감추고 숨어 지냈다. 염선재 부인의 친정이 바로 그들이었다.
나이 17세가 되었을 부친 김수언의 뜻대로 염선재는 이미 기호학맥의 적전으로 후일 서인계 산림(山林)의 종장이던 사계(沙溪) 김장생의 계배(繼配)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때 마침 사계는 첫 부인 창녕조씨의 상을 당해 막 3년 상을 끝내고 있던 때였다. 염선재는 그의 조상 절재 김종서의 신원을 회복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명문대가인 사계 가문에 시집온 것이었다. 2년 후 큰아들 김영을 출산하자 염선재는 이 사실을 사계에게 고백했고 사계는 부인의 비원을 이해하고 명예 회복의 당위성에 공감했다. 그러나 여건이 성숙하지 못해 끝내 조정에 그 뜻을 상주하지 못하고 죽었고 김씨 부인은 이를 한탄하며 단식으로 자진(自盡)해 사계의 뒤를 따라 운명했다.
24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집와 43년 동안 부군을 지성으로 받들었고 슬하에 아들 여섯과 딸 둘을 두었으나 1631년 8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계 선생의 3년 상을 치르고 1633년 12월 9일 부군을 따라 절명했다. 그것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어간 선조 김종서의 신원이 복위되지 못함을 한탄해 스스로 선택한 효열(孝烈)의 죽음이었다. 그의 사후 수백 년간 각계의 효와 열부의 칭송이 자자했고 그가 살던 계룡시 두계면에는 정려비와 정려각이 세워지고 염선재라는 재실과 잠소사라는 사당(祠堂)이 건립되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순천김씨의 생애에는 그 속에 조선 시대의 비정한 정치사가 담겨 있고 조작된 역적의 후손으로 살아가야 했던 몰락한 가문의 한 여성의 한과 설원(雪?)이 담겨있다. 여기에 양반가 여성의 생활사의 단면과 조선 여성의 출중한 효열정신이 배어있다. 생전에 후손들에게 나라의 상을 청하지 않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사후 273년이 지난 1906년 후손 등 123명의 유생이 염선재의 효열을 기리는 정려(旌閭)를 청하는 연명상소를 올려 1906년 4월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정부인' 순천김씨라는 교지가 내려졌다.
최근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절재 김종서 장군 유적지 성역화 사업이 본격 추진되면서 정부인 염선재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더 관심을 끌고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의 몰락한 가문의 여성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좇아 효의 모범을 보였고, 출가해서는 한 가문의 중심을 잡고 중흥시대를 연 현숙한 열부의 본보기라 하겠다. 은둔과 고립의 왕조시대, 성리학과 주자학의 나라에 몰락한 한 집안의 여성으로서의 삶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선대의 설원을 회복한 그는 조선 500년을 대표하는 슬기로운 여성이었고 현숙한 아내였다.
이연우 남서울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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