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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제1기 응급의학 전문의이면서 36년간 응급실을 지킨 유인술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가 오랜만에 응급실 밖에 섰다. (사진=이성희 기자) |
▲응급실 있어도 응급의학 없던 대전
유인술 교수는 1990년 의과대학을 수료하고 전문의사를 향한 꿈을 키우면서 '응급의학'을 소개받은 때를 잊지 못한다. 재건성형에서 전문의가 되려고 전공의를 준비하면서 원광대병원 응급실에서 자처해 당직의를 지낼 때였다. 담당 교수가 그에게 응급의학 전공의가 되어 응급환자를 처치하는 전문의가 되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고, 응급실 당직의 유인술의 첫 반응은 "응급의학이라는 게 뭐죠"였다. 이때까지 국내에 응급실은 있어도 응급의학은 없던 시절로, 응급실은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전공의를 막 시작한 인턴들이 지키던 곳이었다. 응급진료 수가는 다른 진료 과목에 비해 한없이 낮았고 응급실은 거의 '골방수준'으로 환자가 입원을 위해 단순히 거쳐서 가는 통로에 불과한 정도였다. 1986년 열린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국제적 경기를 치르는 동안 응급환자를 이송하고 진료할 전담 조직과 기구가 요구됐다. 자동차의 급속한 증가와 산업재해에서 농업사회에서와 달리 중증 부상환자도 늘었는데 응급의료 공백으로 인해 국민 불만이 높았다. 1987년에서야 국내 의과대에 응급의학과가 처음 개설될 정도로 국내 의료계에서도 응급의학은 경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던 때에 뒤늦게 도입됐고, 1990년 응급의학과가 개설된 곳은 전국에 5개 병원에 불과했다.
그렇게 '응급의학이 뭐죠'라고 되물었던 유인술은 당장 도서관에 가서 관련 도서를 찾아봤다. 응급의학을 소개하거나 참고할 교재 한 권이 없었다. 자료를 물색하다 찾은 게 미국 의학저널이었고 거기서 미국 응급의학회 주소, 연락처를 발견하고 당장 편지를 썼다. 해외에 보내는 팩스 한 장에 50원씩 하던 때로 유인술은 최대한 간략하게 이렇게 적어 미국 응급의학회에 보냈다. '응급의학에 전문의가 있느냐? 연봉은 얼마나 되냐? 응급의학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로부터 3주 뒤에 집으로 국제 우편물 한 상자가 도착했다. 미국 응급의학회가 보내준 홍보물이 안에 있었고 그것을 가지고 시작했다.
유인술 교수는 "나를 지도하는 교수도 응급의학을 처음 접하다 보니 외국 교재를 보면서 교수와 내가 이해하는 게 다를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어디에 물을 곳이 없어 서로 한참을 궁리하다가 마침 환자를 보면서 대조해 그게 이거였구나 이해하는 방식으로 하나씩 익혀갔다"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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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제1기 응급의학 전문의이면서 36년간 응급실을 지킨 유인술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가 응급실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 (사진=이성희 기자) |
유인술은 그렇게 국내 제1기 응급의학 전문의가 되어 1996년 9월 1일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과장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나고 자란 대전에 대학병원 응급의학과가 개설돼 학생을 가르치는 귀한 기회이면서 응급의학 불모지에 가까운 곳을 개척하는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대전과 충남에서 더 나아가 한강이남 유일한 응급의학 전문의였고, 1990년 후반 교통사고 환자 증가와 중독, 산업현장 추락 등의 사고가 늘어나면서 응급의료 수요가 팽창하던 때 대학병원 응급실 책임자가 됐다. 그는 의과대학 교실과 응급실을 오가며 아침 8시에 출근해 보통 자정에 퇴근하고, 집에 있을 때 병원에서 연락 오면 한밤중에도 나가는 일을 반복했다. 응급실 출입에 통제가 없어 환자와 보호자가 뒤섞이던 때로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인턴들에게 맡기지 않고 환자를 직접 보면서 정성을 다했고, 간호사들에게는 매주 수요일 응급환자에 관한 교육했다. 응급환자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일이 알려주며 응급실 틀을 하나하나 잡아나갔다. 새롭게 응급의학을 개척하는 과정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고 보람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응급실을 찾는 환자 수가 이듬해 1만4000여 명으로 1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응급의학과 개설 1년 6개월 지나 1998년 3월 드디어 전공의를 모집해 전문의를 배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가 환자를 치료는 물론 전문의사 양성 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후 충남대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전문의들이 대전·충청지역 병원 응급의학과를 개척한다. 1999년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건양대병원을 비롯해 2001년 학과를 개설한 대전을지대병원 그리고 2003년 충북대병원 외에도 대전성모병원과 대전선병원 응급의학과와 응급실을 유인술에게서 수학한 제자들이 개설 또는 전담했다.
유인술 교수는 "첫 전공의는 을지대병원으로 가서 응급의학과를 개설하고 2회 전공의는 충북대에 응급의학과 만들고 4회차 전공의 선생은 건양대병원에서 응급의학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응급환자 생존을 위한 응급의학이 지역에 뿌리내렸다"라고 설명했다.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는 지금까지 58명의 전문의를 양성했다.
▲응급기금 지키고 중증도 분류 팔 걷어
국내에는 내과와 신경과, 정형외과 등 전문의사 자격을 취득하는 정부가 인정하는 26개 진료과목이 있는데 이중 응급의학은 가장 늦게 시작돼 병원 안에서도 설움도 적지 않았다. 앞서 개설돼 진료체계를 잡은 진료과에서는 응급실에 도착한 환자에게 응급의학과가 나서 초기 처치하는 것을 싫어하며 견제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는 진료과목이 새롭게 개설되고 진료와 인재양성에 30년이라는 시간을 쏟아야 한 세대가 완성된다고 생각하는데 국내 응급의학이 지금 30년 주기에 섰다. 특히, 그는 병원 경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응급의료와 응급실이 그러함에도 발전하려면 정책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응급의학회에서 사무국장 등으로 활동하며 정책 입안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활동 중 응급의료기금을 지키고 확대한 것은 지금의 응급실에 의료인력과 장비를 갖추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119구급대 환자 이송체계를 유지하는 밑거름이 됐다. 1995년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응급의료기금이 생기게 되었고, 2002년 법률개정으로 2003년부터 연간 400억 원 대로 증가했고, 훗날 2008년 재개정이 되면서 2010년부터는 연 2000억 원대로 늘어났다. 응급환자 이송을 위한 전용 헬리콥터를 도입하고 지역에 권역외상센터를 지정해 인력과 장비 기준을 세우는 등 응급의료 인프라를 확대하는데 이 기금이 뒷받침했다. 기획재정부에서 응급의료기금의 효율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기금을 폐지하려고 시도할 때 이를 지켜내고 더욱 확대할 수 있도록 앞에 섰다. 평일에는 일과 중 병원 일을 하고 저녁에 서울로 퇴근한 후 막차를 타고 다시 대전 집으로 퇴근했다. 유 교수는 응급의료기금을 지키기 위해 서울까지 몸으로 뛰고 전략을 함께 고민하던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과 보좌관 시절의 허윤정 전 의원을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언급할 정도로 그때 그들을 진하게 기억하고 있다. 또 한국 응급환자 중증도 분류기준(KTAS)을 2016년 국내에 처음 도입할 때도 응급의학회를 통해 원조인 캐나다에서 판권을 확보해 국내 실정에 맞게 5단계 분류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함께 노력했다.
유 교수는 "그때 윤한덕 교수와 허윤정 의원 우리 셋은 응급의료에 사용할 안정된 재원이 있어야 한다고 뜻을 같이했고, 기금을 어떻게 사용할지 논리를 만들고 데이터를 수집해 정부 부처와 국회를 설득하는데 호흡이 잘 맞았고, 기금을 오히려 확대하는 전화위복이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응급실은 선착순 아닌 중환자 순으로 진료를 본다는 개념이 정립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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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제1기 응급의학 전문의이면서 36년간 응급실을 지킨 유인술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가 응급실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 (사진=이성희 기자) |
그는 응급의료 지금의 현안은 분절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응급환자를 가장 처음 찾아 처치하는 소방과 이후 이어지는 병원의 보건복지부가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병원 전 단계는 의료와 무관한 소방이 전담하게 되어 병원과 연계되지 못하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고 현재까지도 한국응급의료체계에서 가장 큰 숙제로 여기고 있다. 소방에서 환자를 처음 발견해 응급실까지 이송하는 동안 현지에서 응급처치는 잘 되었는지 진료받을 수 있는 병원으로 적정하게 이송되는지 의료계가 함께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 또 응급환자를 경·중증을 구분하고 시민 의료지도와 병원 간 전원 업무 등을 담당하던 1339(응급의료정보센터)를 지금이라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그는 '낮엔 바쁘니 퇴근 후에 응급실 가면 된다'는 인식이 말하는 것처럼 한정된 자원인 응급의료를 비응급 환자의 사용을 제한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경험 중인 의정갈등에서 응급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고, 앞으로도 필수의료 전문의는 갈수록 줄어들 것으로 우려하면서 중증의 고도 응급의료가 퇴보하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의정갈등 정상화에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유인술 교수는 "이번 의정갈등의 전공의 사직과 의과대 휴학 사태는 지금 당장 나타나는 현상이 본질이 아닐 수 있고, 앞으로 10년간 점진적으로 나타나면서 누적될 수 있다"라며 "1년이 아니라 의학교육 10년 대계가 흔들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대담 및 정리=고미선 사회과학 부장·임병안 기자·사진=이성희 부장
●유인술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전문분야 : 재해응급, 환경응급 ▲서대전고·원광대학교 의과대학 졸 ▲충남대 의과대학 응급의학교실 교수 ▲전 대한응급의학회 정책이사·이사장 ▲전 권역응급의료센터협의체 간사(1998~2011년)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현 대전시응급의료지원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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