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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군묘 |
아버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서 5일을 공주에서 머물다 갔는데 같이 온 숭선군은 그 짧은 기간이었지만 공주를 좋아했다. 숭선군이 오룡리 마을을 지나가다가 우물가의 아가씨가 떠준 물에 나뭇잎을 띄워 준 것이 좋아 오룡리를 자주 찾았다는 설화도 있다. 그 때를 못 잊어서인지 숭선군은 죽어서 공주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인 동평군은 그 유언을 받들어 한양서 뚝 떨어진 공주에 숭선군묘가 있게 된다. 숭선군은 왜 이곳 공주에 묻어 달라 유언을 했을까 의문이 든다.
어머니는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고 본인까지도 엮여 강화도로 유배를 갔었지만 효종은 끝까지 동생을 살렸고 남은 생은 평온하게 살다 갔지만 친모가 사사 당하는 꼴을 지켜 보고 권력의 허망함을 체험으로 느껴서 였을까? 죽어서는 편히 쉬고 싶어서 였을까? 궁금해진다.
아들인 동평군마저 역모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여 아버지 숭선군의 신도비를 만들 귀부(거북모양으로 된 비석의 받침돌)만 논에 쳐 박힌 채 지금도 그대로 있다. 비석을 세우려고 귀부를 먼저 묘로 가져가는 도중 난리가 나서 멈추게 되었고 아직도 귀부는 논에 갇혀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자로 태어났지만 숨죽이며 살았던 숭선군묘는 쓸쓸한 풍경을 간직한 채 수 백년을 잠들어 있다.
장은숙 명예기자(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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