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해 여름, 친구는 유성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은행동 성심당 제과점에 왔다며 차 한잔하자고 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나갔더니 친구는 빵을 산 큰 쇼핑백을 양손에 든 채 땡볕에서 빙긋이 웃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이 무더위에… 맛난 빵은 서울에 더 많잖아?" "(그녀는 까르르 웃더니)으응, 이거 TV에서 모 연예인이 먹어서 유명한 건데, 큰애가 먹고 싶다고 해서 1시간 넘게 기다려서 겨우 샀네. 힘들어 죽을 뻔했어." 하지만 친구는 나와 약속만 없었다면 더 기다려서 더 많이 샀을 기세였다. 그녀의 상기된 표정을 보며 나는 순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故事)가 떠올라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친구의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 친구는 결혼을 늦게 한데다, 아들 둘이 대학교 재학 중에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 두 아들 모두 아직 대학생이다. 그러니 아들과 세대 차이가 날 듯도 하지만 친구는 대학생 못잖은 감각으로 맛집 탐방, 영화나 연극, 갤러리 관람 등 하며 대학생 아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어디 그뿐일까, 친구는 야구를 좋아해서 결혼 전에도 야구 시즌만 되면 도시락을 싸 들고 야구장에 가서 살다시피 하더니, 결혼 후에는 아들과 같이 가서 목이 아플 정도로 큰 소리로 응원했다. 친구 남편은 대기업 임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기에 친구가 아빠 몫까지 아이들과 같이했다.
하지만 친구는 가정교육은 엄격했다. 경제관념도 일찍부터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용돈은 각자 아르바이트해서 쓰도록 하는 둥 본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도록 해선지 때론 아이들이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친구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가족 모임을 통해 아이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남편과 의논하여 아이들의 호기심을 가능한 한 충족 시켜주기에 아이들도 크게 불만은 없는 듯했다.
한번은 친구가 나에게 "아들 두 녀석이 자기네들 용돈으로 비트코인에 투자했다는데 제법 돈을 모은 것 같다"고 자랑인지 모를 말을 했다. 나는 걱정이 되어 반문했다. "아직 대학생인데…" "으응, 가족 모임 때 애들이 아빠한테 비트코인에 대해 말하며 용돈으로 투자했다고 하니까, 아빠가 들어보더니 해보라며 각각 얼마간의 용돈을 더 줬대." 친구 남편은 아들 둘이 군 제대 후 복학생이니 성인 대접을 했던 것 같다. 그렇듯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기에 아이들도 부모한테 주저 없이 의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에 비트코인 투자 실패담 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서 친구에게 보내줬더니, 그러잖아도 큰애는 손해를 좀 본 것 같다며, 친구도 아들에게 스크랩 내용을 전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친구는 "아들 두 녀석은 비트코인에서 아주 손을 뗀 것 같다"고 말했다. 문득 그 가족이 화목한 건 친구의 숨은 노력이 있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가부장적인 남편과 자유 지향적인 아들 사이를 오가며 친구가 지혜롭게 대처하며 소통 역할을 해서다.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 (Jean Pau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속에 얼을 주고, 아버지는 빛을 준다.
그런 친구에게 어느 날부터인지 고민이 생겼다. 다름 아닌 남편 은퇴가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아들 두 녀석이 아직 대학생인데 남편이 은퇴하면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나, 하루하루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지만 친구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친구 남편은 은퇴하자마자 곧바로 학원에 등록하여 자격증을 취득, 계약직 직장에 재취업을 한 것이다. 과거 대기업 임원으로 근무하던 때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남편을 보며 친구는 남편이 무척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니 친구는 매일 아침 점심 도시락을 정성껏 준비해서 출근하는 남편 손에 들려줬음은 말할 것도 없다. 친구 남편은 새 직장에서도 성실히 근무해서 올해 초 재계약을 했다는 말을 듣자, 가족을 위해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 같아 친구가 부럽기 조차했다.
친구 역시 개인 사업을 하던 중 건강이 약해져서 잠시 쉬는 동안 매일 저녁 3시간씩 어린아이 돌보미를 하는데 이 또한 가족이 모두 동참한다. 한참 감수성이 민감한 대학생인 큰아들은 돌보미 하는 엄마가 못마땅할 텐데도 어쩌다가 돌보미 아이를 집에 데리고 오기라도 하면, 친동생처럼 잘 돌봐줘서 아이도 두 아들을 잘 따른다고 한다. 친구 가족이 저녁 외식을 할 때도 돌보미 아이도 동석한다니 정말 화목함이 솟아나는 가정이 아닐 수 없다.
그 친구가 내게도 잊을 수 없는 미래를 선물했다. 다름 아닌 올해 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던 만화 김은성 작가의 『내 어머니의 이야기』 전 4권(애니북스)을 선물 한 것이다. 김은성 작가는 친구의 시누이로 가끔 안부는 전해 들었지만, 작가인 줄은 전혀 몰랐다. 친구는 베스트셀러가 꿈인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일까, 씨익 웃으면서 책을 건네주는데 콧잔등이 시큰했었다. 가족은 물론이고 주변까지 두루 챙겨주는 친구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나는 그 책을 볼 때마다 친구 요안나를 생각하며 수없이 속삭인다. 친구야, 고마워!
민순혜/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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