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鄭 변호사의 인문학적 몽골 답사기

  • 사람들
  • 뉴스

[독자칼럼]鄭 변호사의 인문학적 몽골 답사기

정교순(법무법인 유엔아이 대표변호사)

  • 승인 2025-01-21 17:11
  • 한성일 기자한성일 기자
PYH2014072810430006300_P4
정교순(법무법인 유엔아이 대표변호사)
Ⅰ. 여는 글

<목요언론인클럽 주최 몽골기행>



목요언론인클럽에서는 2023년 7월 28일부터 8월1일까지 3박5일 동안 몽골기행 계획을 세웠다.

필자는 평소 몽골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몽골 간의 역사적 관계가 깊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몽골은 고려를 침공하여 자치국으로 삼았으며, 공주를 고려 세자와 결혼하도록 하여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은 후 고려왕으로 임명했다. 시호에는 '忠'자를 붙이도록 하였다.



몽골은 삼별초 군대를 진도, 제주도에서 제압하고, 제주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2회에 걸쳐 여몽연합군을 조직한 후 일본 정벌을 감행하여 고려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또 고려의 제반 정책에 깊이 관여하는 등으로 우리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답사 전에 몽골 관련 서적과 유튜브를 여러 편 보았다. 미국 미네소타주 매칼레스터 인류학과 교수인 잭 웨더포드 저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해럴드램 저 <칭기스칸>, 전근완 저 <칭기스칸과 몽골제국>, 김한창 저 <몽골 유목민의 딸>, 김종래 저 <CEO 칭기스칸>, 정석배 저 <몽골의 역사와 유적>,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를 감명 깊게 읽었다.

칭기스칸이 800여년 전 대제국인 몽골제국을 이룰 수 있게 된 이유와 불과 162년 만에 멸망하게 된 이유, 그 후 몽골고원에서의 북원 등 몽골제국 후손들의 흥망성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삶의 성찰은 무엇인가가 궁금하였다.

그동안 유목민족인 몽골제국의 세계정복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몽골 현지답사를 통해 현장감 있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지적 호기심으로 몽골기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Ⅱ. 몽골제국 흥망성쇠와 칭기스칸의 국가운영전략



<몽골제국 흥망성쇠>



몽골 씨족은 칭기스칸이라는 영웅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초원, 삼림지대(타이가)에 거주하면서 흉노, 선비족(동호의 후예), 유연족(흉노의 후예), 돌궐족(투르크 계열), 위구르족(투르크 계열), 예니세이 키르키스, 거란족(몽골계)의 지배를 받으면서 존재감이 없었다.

부족 명칭도 요나라 시대에 이르러 '실위족'으로 불리었고, 몽골(카마그 몽골)이라는 부족 명칭의 유래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몽골'이라는 말은 몽골어로 '용감한 또는 다수의 중심'이라는 뜻을 가졌고, '잿빛 푸른 이리와 아름다운 붉은 암사슴의 자손'이라는 토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한족들은 유목민족을 멸시하면서 흉노(흉한 노예), 여진(진짜 여자)으로 부르듯이 몽골족을 '아둔한 옛 것'인 '蒙古'라고 부르면서 야만적인 오랑캐로 폄하하였다.

칭기스칸은 처음으로 케레이트 토크릴 옹칸과 자다란 씨족이자 '안다'(생사를 같이 하는 친구)인 자무카 연합세력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를 공격하여 납치당한 아내 보르테를 구했다.

그리고 1189년 자기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몽골고원을 통합하기 위해 '심장 모양의 산' 발치에 있는 푸른 호수 옆 초원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몽골울루스'(부족 또는 나라) 칸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스칸은 몽골고원의 대부족국가인 메르키트,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을 멸망시킨 후 1206년 고향인 부르칸 칼둔 성산 근처 오논강 원류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대칸인 '칭기스칸'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스'는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이 없다는 의미로 늑대를 가리키는 몽골어 치노(CHINO)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고, 칸은 유목민 지도자를 의미한다.(유목부족 지도자를 칸으로 부른 최초의 부족은 유연임)

칭기스칸은 키르키스, 금나라, 호라즘(현재 우즈벡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 탕구트(서하, 티베트)를 차례로 정복하여 영지가 '남쪽의 고비로부터 북쪽의 툰드라까지, 동쪽의 만주 삼림으로부터 서쪽의 중앙아시아까지' 확대되었다.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을 세운 후 각 부족의 세습적인 귀족 칭호를 모두 없애고, 유목부족 전체의 정신적인 통합을 위해 '용감한 또는 다수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몽골을 제국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칭기스칸은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정복 후 티벳 탕구트를 원정하던 중 1227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독화살을 맞고 사망하였다는 설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칭기스칸의 사후 셋 째 아들인 오고타이칸이 중앙아시아를 정복하였다. 쿠빌라이칸이 1271년 大元(위대한 기원, 위대한 시작)을 건립한 후 1276년 남송을 정벌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몽골제국은 유럽과 중국을 정복하여 최전성기 면적은 777만 평방미터로서 알렉산더대왕(348만 평방미터), 나폴레옹(115만 평방미터), 히틀러(219만 평방미터) 등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 보다 훨씬 더 넓었다.

몽골제국 중 러시아 지방은 킵차크한국, 페르시아 지방은 일한국, 중앙아시아 지방은 차가타이한국, 몽골 지방은 오고타이한국이 지배하였고, 지배자는 칭기스칸의 후손인 황금씨족이었다.

원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고려 여인 기황후의 남편인 토곤테무르 혜종은 1368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에게 패했다. 그리고 대도(북경)를 포기하고 몽골고원으로 패퇴하여 상도(후에 카라코룸으로 천도)를 수도로 북원을 건립하였다.

몽골제국은 1206년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을 세운 후 162년 만에, 쿠빌라이가 원을 세운 후 97년 만에 멸망하였다.

몽골 황금씨족이 지배하던 킵차크한국, 일한국, 차가타이한국, 오고타이한국도 내부 분열로 오래지 않아 멸망하였다.

참고로 서양에서는 이슬람제국의 침공으로 기독교도인 유럽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동방의 이슬람제국 저편에 있는 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 경교)왕국 사제왕인 프레스터 존이 이슬람 세력을 물리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프레스터 존이 기독교 울루스인 케레이트 토그릴 옹칸이라는 전설이 있었고, 옹칸은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의 완다로 칭기스칸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칭기스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자무카와 연대하여 칭기스칸에 대항하였다가 멸망하였다.

중앙아시아의 대제국 호레즘은 비록 칭기스칸에 의해 멸망하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알고리즘(알호레즘: 알-사람, 호레즘-지역)을 비롯해 정치, 경제, 수학, 문화 등이 발달한 나라였다



<칭기스칸 국가전략의 위대함>



칭기스칸이 국가경영전략에서 보여 준 위대함은 요즘 국가경영이나 기업경영에도 매우 유익하다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본다.



1. 몽골민족의 꿈과 희망 공유



칭기스칸은 9살에 아버지 예수게이를 잃었고, 연이어 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생사를 넘나드는 역경을 헤치면서 삶의 지혜를 얻었다.

지금부터 800여 년 전 몽골초원에는 '메르키트, 케레이트, 나이만, 타타르, 몽골' 등 다섯 부족이 강(가뭄), 조드(강추위) 등 극한의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시로 부족 간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칭기스칸은 부족민과 부하들에게 극한 자연 환경으로 인한 부족 간 전쟁을 끝내고 밖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만이 몽골민족이 살 길이라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 일치된 단결심을 이끌어냈다.

칭기스칸은 '한 사람의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만인의 꿈은 현실이 된다'는 꿈과 희망의 공유를 실천하였다.



2. 합의제 쿠릴타이에 의한 주요 정책 결정



칭기스칸은 부족의 중요한 정책에 대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부족회의인 쿠릴타이를 열어 합의제로 부족 지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칭기스칸은 자신을 이을 후대 칸도 쿠릴타이에서 선출하도록 하였다.

'쿠릴타이'는 부족 지도자들의 모임으로 부족의 중요 정책에 대해 신중하게 합리적으로 결정하였고, 이로 인하여 칭기스칸은 부족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중요한 정책을 신속하고 강력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결정은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다'라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3. 인재 선발의 개방적 사고



몽골 유목민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강한 믿음과 결속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맺은 관계를 '너커르'(평생 동지), '안다'(평생 친구)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진한 전우애를 보여주었다.

칭기스칸은 혈연이나 신분이 아닌 능력과 인품만을 보고 개방적으로 인재를 선발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선발된 이른바 개국공신인 '4준마'(보르초, 모칼리, 보로콜, 칠라운), '4맹견'(제베, 수부타이, 젤메, 코빌라이)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광대한 몽골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4. 열린 정보 마인드, 기술자 우대



전쟁은 '나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고 한다.

칭기스칸은 아라비아 대상 등을 통하여 열린 마인드로 상대의 군사력, 인적, 물적 정보를 수집하여 전략 전술을 세웠고, 포로 중 기술자를 우대하여 개발한 새로운 무기로 적의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5. 전리품 공정 분배에 의한 적극적인 전쟁 동기 부여



유목민은 전쟁에 승리할 경우 선착순 약탈방식으로 먼저 도착한 군인들이 가축, 여자, 포로 등을 약탈하여 전리품을 독차지 할 수 있었으므로 보급품 수송 등 전쟁을 간접적으로 지원한 군인들에게 전리품이 돌아가지 않아 군인들 사기 진작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칭기스칸은 전쟁에서 개인적인 약탈을 금지하고, 전리품을 공유하여 전쟁이 끝난 후 공적에 따라 분배하였고, 이는 현대판 스톡옵션으로 군인들에게 전쟁 동기를 적극적으로 부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칭기스칸 군대는 일치 단결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몽골제국의 멸망 원인>



칭기스칸은 유언으로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고 하였다.

원세조 쿠빌라이칸은 중국대륙을 통치하기 위하여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대도(북경)로 옮겼고, 원은 몽골민족의 한족화를 방지하기 위해 몽골족, 색목인을 우대하였으며 라마교를 받아들여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다.

원 황제와 귀족들은 점차 성안의 안락함에 안주했다. 황제와 귀족들의 부패와 부당한 세금 징수 및 매관매직, 칸의 계승권을 둘러싼 왕실 내부의 분열 및 귀족들의 권력다툼, 라마승의 횡포로 인한 재정 파탄, 몽골인 지상주의 정책 등으로 한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몽골제국은 건국 후 162년 만에 멸망했다. 원의 멸망이유는 현대 국가 운영에서도 유념해야 할 보편적인 요소이다.



<북원의 건립과 멸망>



대원의 마지막 황제인 토곤테무르 혜종은 1368년 주원장에 의해 몽골고원으로 쫒겨나 대원의 여름 수도인 상도를 수도로 삼아 몽골제국의 뒤를 이었다. 후대에 이를 대원과 구별하여 북원이라고 불렀다.

2대 황제는 혜종과 고려인 기황후 사이에 태어난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로 묘호는 '소종'이었고, 북원도 칭기스칸의 후손인 황금씨족이 황제를 이어 갔다.

북원은 몽골고원에서 재기를 꿈꾸었으나 점차 황제의 권위는 사라졌고, 부족집단 추장들이 '타이시(중국의 태사)'라는 실권자 자리를 놓고 동몽골, 서몽골로 분리되면서 1388년 사실상 멸망했다. 1635년 몽골부족인 차하르부 몽골대칸인 릭단칸이 후금 홍타이지에 의해 패망하면서 명목상으로도 소멸되었다.



<몽골제국 후손들의 몽골고원 지배 및 멸망>



서몽골은 오이라트(와랄), 동몽골은 타타르(달단)라고 불리었고, 이후 동몽골 타타르는 고비사막을 경계로 막남과 막북으로 나뉘어 몽골족은 '막서몽골(오이라트, 후에 준가르), 막남몽골(현재 중국 내몽골자치주), 막북몽골(외몽골, 현재 몽골인민공화국)로 분리되었다.

명나라는 1368년 개국 시부터 1644년 멸망할 때까지 276년 동안 몽골을 복속시키려고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명나라 말기에는 오히려 몽골이 명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449년 7월 명나라 6대 황제 정통제(주기진)는 친히 '북로 진압'에 나섰으나 오이라트 수령 '에센타이시'에 의해 하북성 토목보에서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이를 토목의 변이라 부른다.

15세기 말 동몽골 타타르에서 칭기스칸 가문 황금씨족 출신인 '바투몽케'라는 영웅이 나타나 '다얀칸'을 자칭했다. 바투몽케는 오이라트를 격파하여 힘을 못쓰게 만들었고, 명나라 요동과 화북을 점령하였으며 몽골고원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바투몽케는 몽골고원 통일 후 휘하 여러 부족을 6개 부로 재편했다. 준가르라고 부른 좌익(동부)은 차하르, 칼카, 우랑카이 3개 부로 다얀칸이 직접 지배하였고, 바룬가르라고 부른 우익(서부)은 오르도스, 투메트, 코르친 3개 부로 아들인 지농(2인자 칸)이 다스리도록 하였다.(몽골어로 준은 왼쪽, 바룬은 오른쪽을 의미하고, 우리말과 비슷함)

참고로 우랑카이족은 후에 만주 방면으로 이동하여 여진족으로 분류되기도 하였고, 한반도를 자주 침입하였으므로 족명이 오랑캐의 어원이 되었다.

1543년 다얀칸이 죽은 후 아들과 손자들이 40여개 부락들을 나눠 가졌다. 맏손자인 '보디칸'이 가장 큰 차하르 부를 차지하였고, 이 후 몽골의 칸은 차하르 부에서 배출되었다.

만주족 누르하치는 몽골족과의 연대를 위해 1612년 몽골 코르친 부족장 밍안의 딸 '보르지키트'를 측비로 맞았고, 밍안의 동생 콩궈얼의 딸을 수강태비로 맞았다. 밍안과 콩궈얼의 형 망구스는 홍타이지에게 딸과 두 손녀를 시집보냈는데, 결국 홍타이지의 황후와 후궁 15명 중 7명이 몽골족 여인이었다.

1615년에 망구스의 아들 자이상은 딸을 홍타이지에게 시집보냈다. 이 여인은 훗날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문황후로서 홍타이지 사망 후 누르하치의 아들인 실권자 도르곤과 연인관계를 맺어 아들을 황제에 오르도록 한 여걸이었다. 도르곤은 어린 순치제를 대리하여 실질적으로 청나라를 지배하였고, 사후 순치제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순치제의 아들이 청나라를 역사의 반열에 올려놓은 강희제이다.

도르곤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최고사령관이었다. 북경 점령 최선봉장으로 소현세자를 대동하여 북경 정벌 현장을 목격하도록 하였으며 조선 여인 사이에 두 딸을 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1634년 차하르 부 마지막 칸 릭단칸은 누르하치에게 대항하다가 홍타이지에 패해 도망다니던 중 1635년 감숙성에서 전염병(천연두)으로 사망하여 북원은 명목상으로도 멸망하였다.

홍타이지는 차하르부 정벌 과정에서 '대원 전국옥새'를 얻음으로써 몽골대칸이라는 지위를 갖추게 되어 중국대륙 정복을 위한 발판을 만들 수 있었다.

몽골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중앙아시아에는 몽골제국의 후손들이 각자 분열되어 생존을 이어갔는데 1755년 청나라 건륭제에 의해 신장지역의 몽골족의 마지막 제국인 준가르가 멸망하였다.



<몽골인민공화국의 건립 및 민주화 과정>



청나라는 몽골을 편입한 후 티벳 출신의 라마승을 왕으로 임명하여 몽골을 다스리는 기미지배(중국의 역대 왕조의 주변 국가에 대한 간접지배 방식으로 말이나 소의 고삐를 잡고 부린다는 의미) 방식으로 몽골을 지배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되면서 독립운동이 확산되었고,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중국의 자치주로 존립하였다.

1921년 7월 11일 몽골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흐바타르는 몽골인민(혁명)당을 창당한 후 소비에트 적군과 연합하여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1924년 11월 26일 친러시아 정부는 새로 재정된 헌법에 따라 '몽골인민공화국'임을 선포하여 역사 상 2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그때부터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중국은 1946년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나 내몽골은 자치주로 편입하였다.

몽골인민공화국은 소련이 해체된 후 1988년 12월경 몽골판 페레스트로이카인 신칠렐 정책을 채택하였고, 1990년 7월경 인민혁명당 일당 독재포기 및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같은 해 9월경부터 민주화 및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가속화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몽골의 면적은 세계 17위이자 한반도의 7배에 달한다. 인구는 350여만명이며, 울란바토르에 150만명 정도 거주하고 있고, 국민소득은 5,000불 정도로 알려져 있다.

몽골에서는 우리나라를 솔롱고스, 즉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르는 등 동경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이태준의 몽골 판 슈바이처 헌신>



大岩 이태준은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의 의사가 되었다.

의사 이태준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심하게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치료한 인연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다.

이태준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에서 의료인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김규식의 권유로 군관학교 설립을 위해 몽골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을 설립, 운영하여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중국, 러시아인이 세운 병원에서는 자국 국민만 치료하였으나 이태준은 몽골인 다수가 감염된 화류병(성병 등)을 개방적으로 치료했고, 그 공로로 몽골 마지막 황제 보그드칸 주치의로 활동했다.

이태준은 독립자금을 운송하던 중 몽골을 점령한 소련 백군(왕당파)에 의해 체포되어 38세에 처형당했다.

당시 몽골에서는 이태준 의사를 '하늘에서 내려온 여래불 또는 신'으로 추앙하였고, 몽골판 슈바이처로 존경하여 몽골 최고훈장을 수여하였다.



Ⅲ. 몽골에서의 여정



<청주공항에서 몽골 울란바토르 칭기스칸공항으로>



2023년 7월 28일 오전 7시경 청주공항에서 목요언론인클럽 한성일 회장과 문성식 변호사, 박덕풍 회장, 건양대 김근종 교수 등 15명이 몽골국적기 'HUN NU'에 몸을 실었다. 서해바다와 요동반도를 거쳐 3시간 만에 몽골 울란바토르 칭기스칸공항에 도착하였다.

몽골국적기에 유럽 게르만대이동의 원인을 제공한 훈족의 명칭이 들어간 것이 호기심을 끌었다.

비행기가 몽골고원에 들어서자 지상에는 거친 모래와 자갈이 널려있는 고비사막(고비는 몽골어로 사막을 의미함)이 펼쳐졌고, 물이 흘러간 흔적의 건천이 뱀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으며 어쩌다가 게르(몽골어로 집) 몇 채의 마을이 나타나기도 하여 일행은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칭기스칸공항의 첫 인상은 소규모 공항으로서 여성스럽고 차분했다. 하늘은 눈부시도록 푸르렀으나 도시 근교 화력발전소 운영으로 인한 오염으로 공기가 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몽골기행 일정>



몽골기행 첫날. '울란바토르(몽골어로 붉은 영웅: 청나라로부터 몽골을 해방시킨 러시아 백군을 의미) 시내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탑, 복드칸 겨울궁전(몽골을 마지막으로 지배한 라마승 궁전)'등을 방문한 후 테를지국립공원 내 게르촌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차창 밖으로 펼쳐진 一望無際의 초원지대는 황홀함 그 자체였고, 초원지대나 만주 벌판에 마적이 횡행하였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테를지국립공원은 엄청난 크기로 골짜기 마다 관광객을 위한 게르촌이 수없이 형성되어 있고, 골프장도 조성돼 있었다.

게르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들의 향연을 기대하였으나 게르, 식당 등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환상적인 풍경은 볼 수 없었다. 그러한 모습은 알타이산맥 기슭에 있는 홉스쿨 정도나 가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게르 안에는 가장자리에 침대 4개, 가운데에 탁자 1개, 화장실이 있었고, 게르촌 중앙에 공동샤워장이 있어 여성들의 공분을 샀으나 그런대로 사용할 만하였다.

둘째날. 테를지국립공원 내 야산에 있는 거북바위, 코끼리바위 등을 보면서 영겁의 세월을 실감했다. 초원을 걸어가는 승마체험을 하였는데 기수들 대부분이 초등학교 2, 3학년 정도 어린이들이었으며 남루한 옷, 작은 키, 새까맣게 탄 얼굴빛, 어두운 눈빛 등이 어릴 적 초등학교 친구들 모습을 닮아 있었다.

기수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즉석 2인 마상경기를 하도록 하여 초원의 말달리기 현장을 직접 목격하였고, 모두에게 흡족할 만큼의 포상금을 주었다.

공개된 게르에서 유목민이 마두금 악기를 연주하고 여인이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등 연기를 하였으나 옛날의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셋째날은 유목민의 삶의 방식과 전통을 느낄 수 있는 노마딕쇼를 관람하는 등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울란바토르로 이동하던 중 아파트 4층 높이의 거대한 칭기스칸 기마상을 견학했다.

몽골에서는 '칭기스칸이 아버지의 안다 케레이트 옹칸과 자신의 안다 자무카 연합군대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족을 공격하여 납치당한 처 보르테를 구한 것'을 기념하여 연합군대가 진군한 이곳을 기념하여 기마상을 세웠다고 한다.

넷째날. 이 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을 견학했다. 박물관은 현대식 4층 건물에 칭기스칸 유물, 유적을 전시하고 있었다.

몽골기행의 알파와 오메가는 몽골역사와 한국어를 구사하는 가이드를 섭외하여야 하므로 수 회에 걸쳐 이를 요구하였음에도 우리팀 가이드는 초보였다.

다행히 가이드가 스승이자 한국 숙명여대에서 5년간 공부한 후 '몽골 서사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40대 여성을 해설사로 섭외했다. 해설사로부터 3시간 정도 유익하게 설명을 들었고, 사비로 상당한 강의료를 주어 보답하였다.

울란바토르에 있는 한국어 전문대학인 후레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레대 학생들이 한국 유학, 취업을 꿈꾸면서 열심히 공부한다는 설명을 듣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몽골 라마교 총본산 간당사원과 몽골 전통공연을 관람했다. 세련된 연주와 춤을 선보였으나 공연자들의 처우가 열악하다는 말을 듣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태준 유적 답사를 하려고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수리 중이므로 견학을 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국가보훈부는 2024년 6월 16일 공사비 19억6,000만원을 들여 울란바토르에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이태준 기념관을 신축한 후 광복 80주년인 2025년 상반기에 개관할 예정이라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마지막 날 02:00경 출발 예정이었으나 항공사 사정으로 조금 늦게 출발하여 시원섭섭한 몽골기행을 마무리 하였다.



Ⅳ. 맺는 글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역사를 공부하라, 그 안에 통치학이 다 들어있다'고 말하면서 역사에 삶의 지혜가 들어있음을 강조하였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몽골기행을 통하여 몽골제국의 흥망성쇠를 다시 한번 되새겨 봄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선후배 변호사님들께 결코 후회하지 않을 몽골기행을 적극 권유하면서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정교순(법무법인 유엔아이 대표변호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31. 대전 서구 둔산 2동 일대 일식 면 요리
  2. 세종시 골프장 인프라 확대...2029년 '힐데스하임CC·리조트' 가세
  3. 대전 유성구 어은동 아파트 화재…이재민 6명 발생·31명 대피
  4. 대전시, 소상공인 임대료 지원 나선다
  5. [사설] 현대제철 노사 상생 방안 모색해야
  1. 깡통주택 140명 피눈물 흘릴때 명품소비 50대 전세 사기범
  2. "대전 시내버스 서비스평가 보조금 부정의혹 재수사하라"
  3. [사설] 대전시·LH 손잡은 전세사기 피해 지원
  4. 대전맹학교 졸업 윤민서 씨 아주대 심리학과 합격 "소외된 이들의 권익 위해 일하고 싶어"
  5. 천안의료원-천안시공무원노동조합 업무협약

헤드라인 뉴스


尹, 헌재선고 임박… 충청 찬반 대립 첨예화

尹, 헌재선고 임박… 충청 찬반 대립 첨예화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이 임박하면서 충청 정치권에서도 찬반 대립이 격화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을 각하해야 한다는 여당인 국민의힘 측 주장과 인용을 촉구하는 더불어민주당 등 범야권 등 두 쪽으로 갈린 채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다. 양 진영은 국회의원은 물론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지방의원까지 총동원 돼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어 탄핵 심판이 어떻게 결과가 나오든지 심각한 후폭풍이 우려된다. 민주당기기초자치단체장협의회와 전국자치분권민주지도자회의(KDLC, 이하 회의)는 12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윤 대통령..

전국 공동주택 공시가격 상승세… 대전·세종은 하락
전국 공동주택 공시가격 상승세… 대전·세종은 하락

올해 전국 공동주택 공시가격이 오른 가운데, 대전과 세종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과 수도권의 증가가 눈에 띄면서 아파트값 양극화가 공시가격에 그대로 드러났다. 국토교통부는 올해 1월 1일 기준으로 조사·산정한 전국 공동주택(아파트·다세대·연립주택) 1558만 세대의 공시가격을 공개하고 4월 2일까지 소유자 의견을 받는다고 13일 밝혔다. 정부는 2023년 공시가격부터 3년 연속 시세 대비 공시가격 비율(현실화율)을 69.0%로 적용해 공시가를 산출했다. 이에 따라 시세 변동 폭만 공시가격에 반영됐다. 올해 전국 공동주택의 평..

4·2 대전시의원 보궐선거, 3당 일제히 후보 등록… "내가 유성발전 적임자"
4·2 대전시의원 보궐선거, 3당 일제히 후보 등록… "내가 유성발전 적임자"

4·2 대전시의원 보궐선거 주자들이 13일 일제히 공식 후보 등록을 마치고 승리를 결의했다. 더불어민주당 방진영, 국민의힘 강형석, 조국혁신당 문수연 후보는 이날 대전 유성구선거관리위원회를 찾아 후보자 등록을 마쳤다. 이번 보궐은 고(故)송대윤 전 대전시의회 부의장의 사망으로 치러진다. 보궐선거 특성상 다소 주목도가 떨어졌지만, 탄핵 정국과 맞물리며 정치적 의미와 관심도가 크게 높아졌다. 각 후보 캠프와 3당 시당도 이 같은 정국 상황과 맞게 선거전략을 수립하고,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구상 중이다. 우선 민주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머리 보호한 채 안전한 장소로 대피 머리 보호한 채 안전한 장소로 대피

  • 윤 대통령 탄핵 판결 임박…찬반 대립 첨예화 윤 대통령 탄핵 판결 임박…찬반 대립 첨예화

  • 대전시의원 보궐선거 레이스 본격화…첫 날 후보자 3명 등록 대전시의원 보궐선거 레이스 본격화…첫 날 후보자 3명 등록

  • 성큼 다가온 봄 성큼 다가온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