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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 북-칼럼니스트 |
연초에 스마트폰에 저장된 지인들의 이름을 정리할 일이 있었다.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아 얼굴과 매칭이 되지 않는 이름, 의례적으로 축일이나 생일에만 문자로 주고받는 이름, 일과 필요에 따라 연락하는 현재진행형 이름 등. 그렇게 분류하다 보니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냥 '아는 관계'였다. 순간 내가 어떤 관계의 가지치기 속에 살고 있는 걸까,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가 오프라인까지 얼마나 연결되는 것 일까라는 쓸쓸하고 씁쓸한 생각의 실타래가 뒤엉켰다.
이와 같은 일상의 모습을 통해 필자 역시 격리된 거울 속에 갇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문(門)을 열지 못한 채, 기껏 세상을 구경하는 창(窓)에 만족하는 스마트폰 인간(homo cell-phonicus)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어가는, 접촉은 불편하고 접속은 편안한, 접촉은 낯설고 접속은 익숙한 그런 모습 말이다. 갈수록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점점 멀어지면서 낯설어지는... 하여 우리 사회의 풍경속에 고립되는 사람은 늘어가고, 폰을 옆에 두지 않으면 큰 불안과 우울증에 빠지는 노모포피아(non-mobile-phone phobia)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스마트폰이 엄청난 편리함을 주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망치는 부분도 분명하다.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이리저리 터치하고 넘기다 보면 나와는 관계없는 정보는 밀어내고 내가 좋아하는 내용은 확대된다. 또한 그렇게 터치하는 검지는 모든 것을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세상을 손안에 쥐고 있는 듯, 자신 자신을 향한 몰입도를 끌어올리며 세상을 나의 필요에 복종하게 한다.
그러다보니 가상현실(virtual reality)에 구현된 세상이 내 손안(자기 자신의 실현)에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급기야 '타자(자기 배려의 동반자)의 결핍'이란 현상이 나타난다. '너'를 완전히 잃어가는 항해의 '가짜 선장'이 되어버린다. 터치의 결과는 '나'는 주인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채찍질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착취하는, '나는 주인인 동시에 노예'란 역설적 존재가 된다.
게다가 가장 아픈, 겪어서는 안 되는 비극적 현상은 이것이다. 스마트 폰이 생겨난 이래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일이 드물다보니 시선(始線)이 사라져간다는 점이다. 엄마가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동안 어린아이는 엄마와의 눈 맞춤은 사라지면서 아이는 자신과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가 망가지고 공감과 공명은 무너진다. 스마트폰은 시선을 앗아간다. 혹 '눈 맞춤의 결핍'을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아픔의 원인(原因)으로 여긴다면 지나친 허언(虛言)일까.
이제 각기 다른 현실적 이유로 행실의 여과가 다르겠지만 과감하게 '매일 스마트 폰 잃어버리기 연습'을 해보자. 물론 이 작업은 이미 뇌와 눈과 입 그리고 발의 일부를 담당했던 심부름꾼으로 몸의 일부가 되어 있기에 없는 만큼 불편할 게다. 걱정하지 말자. 우린 '또 다른 적응(몸만들기)의 천재'가 아닌가. 이제까지 시야, 속도, 생각, 이 모든 것들은 스마트폰 안에서 이루어졌다. 스마트폰에서 벗어나게 되면, 더 넓은 세상을 나의 기준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나를 찾는 성찰의 순간이다.
'스마트폰과의 말 트기'인 손가락(접속:touch)을 멈추자. 말을 하지 않는 손(스마트폰 잃어버리기)은 어떤 무엇보다도 더 많은 것을 접촉한다. 작심삼일이 벌써 여러 번 무너진 구정 명절을 앞 둔 지금. 며칠 후 만날 가족·친지들에게 그래, 올해 '우리 접속은 줄이고 접촉은 늘이자'는 다짐과 침묵의 덕담을 건넨다면 그저 오래만 산 'k-라떼'의 슬픈 우화일까./김충일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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