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삼도봉(1,178m)은 세 개 산줄기의 중심점인데, 북쪽으로는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의 물한계곡(초강천), 동쪽으로는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의 부항천(釜項川), 남서쪽으로는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미대천(美大川)의 분수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의 영동군과 서쪽의 무주군으로 흘러가는 물은 금강에서 만나지만, 동쪽의 김천시로 흐른 물은 오로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충북의 알프스'라고 부른다.
민주지산(岷周之山)은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는 중요한 길목이고, 추풍령(秋風嶺)에서 남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황간과 김천에 큰 장이 서면 오가던 장꾼들이 모여들고, 한편에선 풍각쟁이들의 품바 소리가 구성지게 이어졌다. "'껑충 뛰었다 제천장 신발이 없어 못보고/바람이 불었다 청풍장 선선해서 못보고/청주장을 보잤드니 술이 취해 못보고. 보은 청산 대추장은 처녀장꾼이 제일이요/엄범중천에 충주장은 황색 연초가 제일이요. 쌀도 흔타 미원장날어델 가서 요길 하나/내칭장을 보러가다 목계장에서 취해버렸다/지리구지리구 잘한다/품파품파 잘한다.' 구성지게 부르는 장타령에 힘든 줄모르고 넘는 곳이 추풍령인데, 이 산은 그리 높지 않은 고갯길이다.
영동군은 전형적인 내륙 지역이기 때문에 일교차가 큰 편이며, 체감상 여름에도 열대야가 없을 정도지만 대신 겨울에 정말 춥다. 바람이 산계곡을 타고 몰아치기 때문에 그 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영동이 과일이 유명한 이유는 이러한 큰 일교차 때문이다.
필자는 영동 감과 호도의 주산지인 상촌면을 찾았다.
마침 경남매일 정창훈 대표의 누님이 상촌면 상도대리에 살고 있어 영동까지 왔으니 차 한잔 하고 가라 하여 방문 하였다.
정대표의 누님은 남편 조희제씨와 영동의 3대 과일인 곶감과 호두, 포도 농사를 짓고 있다. 따뜻한 둥글레 차와 함께 내놓는 영동의 곶감은 곶감과 호두 맛이 그동안 내가 맛봤던 곶감과 호두와 전혀 다르다.
곶감은 윤기가 흐르며 마치 진한 꿀처럼 입안에 사르르 녹을 정도로 맛이 있고 호두는 무척 고소하다.
좀 구매할까 했는데, 금년 곶감 농사는 주문이 끝나 완판되었다고 한다.
감타래에 매달린 곶감.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일부 감나무에는 까치 밥인양 가지에 아직도 매달려 이미 먹시[黑子]가 되어 있다.
영동곶감은 언제부터 유명해 졌을까→
물론 옛날부터 감나무 한 두 그루씩은 있었겠지만 영동에서 본격적으로 감나무를 식재하기 시작한 것은 1911년 일본인 이토(伊藤)라는 사람이 감 생산을 위한 감나무 관리와 곶감 제조법 등에 대한 강습회를 개최하였고, 1915년에는 후쿠타(福田)라는 영동군 농업기수가 개량곶감 제조법을 일반에게 알려 주며 판로 확장에 노력하였다.
상촌 개량 곶감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지만 주로 설날 제물용이나 어린이 간식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기차역이 있는 황간에 호두, 곶감의 출하조합을 만들어 판로를 확장해 나갈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매일신보 1932년 10월 9일
이 때 영동의 매곡면, 상촌면, 황간면이 주생산지인데, 상촌면이 8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고 나온다.
특히 1932년에 호두와 곶감이 전국적인 명산품이 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황간곶감 호두출하조합을 창립하므로써 황간곶감을 알려지게 된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영동의 곶감과 호두는 조선 각지는 물론 일본 주요 도시와 만주에 까지 명성이 자자하
였다.
지금도 상촌면의 곶감은 상도대리 뿐만아니라 물한리, 대해리, 둔전리, 고자리 등도 곶감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보통 곶감을 만들기 위한 감으로는 먹감이라고 하는 둥시와 수시, 월하시, 고동시 등이 있는데, 감수확은 찬이슬이 맺힌다는 한로 때부터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 사이, 즉 10월에 많이 따는데, 감이 곶감이 되기까지는 여러 과정과 정성, 시간이 필요하다.
상촌면은 원래 무동시 아니면 떫은 감의 일종인 고동시로 이 고동시는 곶감도 깎고, 홍시도 먹으며, 울커서 먹기도 한다. 다른 감보다 무동시는 좀 늦게 따는데, 원래는 서리 맞구 따야 곶감 하기 좋다고 한다. 감 매달아 놓고 나서 볕이 잘 나야 분이 잘 나오는데, 비오면 물러 건조대 즉 타래 달아놓는다.
감나무 하나에 100접(한 접에 100개)씩 따는 것이 있고, 보통은 나무마다 20, 30접은 딴다.
씨없는 곶감용 감인 무동시는 해갈이가 없다. 다른 감나무는 보면, 나무를 뚝뚝 꺾어놓기 땜에 그다음 해에는 많이 안 연다. 그래서 곶감하는 감나무는 한 해 많이 열면 한 해는 안열고 하는 해갈이를 한다.
특히 이 곳에서는 아직도 곶감을 일일이 손으로 깎는 전통적인 방법을 지켜오고 있다. 이른바 손 곶감 마을인 셈이다. 물론 곶감을 내는 분들이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시기 때문에 좀 불편해도 기계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엣날에는 감을 따고 나면 먼저 껍질을 깎아내고 꼬챙이나 줄에 일정량씩을 꿰어 바람이 잘통하고 햇볕이 잘 드는 처마 밑에 걸어 두기도 했는데, 집집마다 그 모습이 장관이었고, 이모습을 촬영하려고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 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지붕에 설치된 건조대인 감타래에 매달아 약 한 달 정도 건조시킨다. 담홍색의 감은 18.5°정도로 당도가 높아 연시로도 곶감으로도 맛이 좋다. 산골이라 일교차가 커서 줄에 매달은 감이 밤이면 기온이 떨어져 얼고 낮이면 다시 올라가 녹고 하는 과정이 반 복되면서 표면에 포도당의 일종인 흰가루가 생기면서 당도가 높아지면 맛있는 곶감이 만들어 진다.
곶감 표면의 흰가루를 '시상(霜)', '시설(屑)'이라고 하는데, 기관지염을 낫게 하고 폐를 튼튼하게 해준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밝혀진 바로도 감은 사과나 귤보다 훨씬 많은 비타민C를 함유하고 있는데, 특히 곶감으로 말리면 당분은 네 배, 비타민은 2∼7배까지 많아진다.
곶감쌈.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상촌면의 곶감은 영동군의 곶감 70%를 생산한다고 한다. 곶감타래를 가진 집에서는 마을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중에 내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곶감을 내고 있어 혀에 착착 감기는 영동 곶감을 현지에서 실컷 맛볼 수도 있다.
사실 필자는 좀 늦게 방문해 곶감 말리는 장관을 구경할 수가 없어 작년에 찍어 놓은 사진을 쓸 수밖에 없다.
본래 '곶감'이란 말은 '곶다'에서 온 것으로, '꼬챙이에 꽂아서 말린 감'을 뜻한다. 된소리로 '꽂감'이라 하는 것도 '꽂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꽂아서 말린 감은 영양도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동의보감(東醫寶鑑)』이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곶감이 기침과 설사,
또 각혈이나 하혈, 숙취 해소에 좋다고 했다. 곶감을 고를 때에는 너무 딱딱하거나 무른 것, 색이 검은 것은 피하고, 곰팡이가 피지 않고 깨끗한 것이 좋다. 곶감은 말리는 방법과 지역에 따라 모양도 약간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납작하게 눌러 말린 것은 제수용으로 쓰고, 씨가 없으면서 덜 마른 것은 곶감에 호두나 잦을 박아 놓은 '곶감 쌈'에 쓰며, 곶감에 꼬챙이 꿴 흔적 없이 꼭지를 달아 말린 것은 수정과에 쓴다. 최근에는 곶감조차 수입산이 많이 쓰이고 있다. 수입 곶감은 우리 곶감에 비해 곰팡이가 많이 피어 있으며, 표면에 흰가루가 많은 편이다. 또한 우리 곶감에 비해 두께 가 얇고, 꼭지 부위에 껍질이 많이 붙어 있으며, 필요 이상으로 딱딱하거나 무르다고 한다.
영동은 우리나라 호두의 주산지로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화하면서 밤낮의 기온차가 있는 재배 적지이며, 영동 호두는 해발 1,242m의민주지산 기슭인 황간면과 상촌면 일원에서 생산되는 호두는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화하면서 밤낮의 기온 차가 큰 재배 적지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생산된 호두는 천연식품으로 껍질이 얇고 살이 많아 그 품질이 매우 좋아 이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며, 전국 생산량의 10%에 달한다.
곶감.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우리나라의 호두나무는 4세기말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충남 천원군 광덕면 광덕리 일대에 재배되고 있는 호두나무는 700여년전 고려중엽에 중국당나라에서박피호두를 도입하여 식재한 것이 그 기원이라 한다. 지금도 광덕사에는 약 300∼400년된 호두나무가 있다.
우리나라 호두나무의 주요 분포지는 충북 영동, 보은, 충남 천안, 공주, 온양, 전북 무주, 진안, 경북봉화, 예천, 상주, 금릉, 경남 함양 등지에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도 호두를 아홉가지 과실(九果)의 하나로 꼽고 있다. 한반도 전토에 전파된 호두는 다시 16세기 초엽(1521∼27)에 일본에 양잠교사로 건너간 사람들이 선물로 가지고 간 것이 재배되기에 이르러 일본에는 오늘날와서도 한 품종으로서 한품종으로서 '한국호두'가 남게 되었다. 『대화본초(大和本草)』에도16∼18세기에 조선인들이 처음 호도를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박피호두(Juglans nigra var. orientis Kitamura)의 일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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