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식 배재대 특임교수·행정학 박사·도시공학 박사 |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단계적 진행이 인간의 운명적 균형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동안 살아있음에 과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왔다. 반면에 죽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평가나 반응은 현대에 들어서도 비교적 제한적이거나 냉담하다. 살아있는 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편향적 사고방식일 수도 있으나, 초고령화 시대를 맞아 연장된 수명의 말기 증상인 심신 노화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지고 있는 점도 감출 수 없는 장수 인류의 불행한 현실이다. 이제라도 현실을 반영하는 균형 잡힌 생과 사의 논의가 신중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뤄져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Memento mori(그대는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Memento te hominem esse(그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Respice post te, hominem te esse memento(뒤를 돌아보라, 지금은 여기 있지만 그대 역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역사상 초유의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고대 로마 공화정시절, 전쟁에 승리한 장군을 위해 거행되는 개선환영식에서 영광의 주인공인 장군이 탑승하는 전차에는 한명의 비천한 노예가 함께 승차해 죽음을 결코 잊지 말라(Memento mori)는 말을 끊임없이 속삭였다고 한다.
역사 이래로 대다수의 인간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은 외면하거나 부정하려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필연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의미를 진정성 있게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동반자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삶이 소중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매 순간과 하루하루까지도 소중한 가치실현을 위해 의미있게 살아야 하는 것도 어느 순간 삶을 마무리하는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평온한 마음 상태에서 삶의 마무리가 아름답게 이뤄진다. 역대 모든 종교는 무상하고 그림자와 같은 현실의 세계와 달리 죽음으로 맞이하는 차원을 일컬어 불변하는 진리와 궁극적 실재의 수준으로 설명한다. 천국과 하나님의 왕국, 열반(涅槃)과 진여(眞如)가 그것이며 도(道)로 언급되기도 하고, 아뜨만 (Atman)과 브라흐만 (Brahman)으로 표현한다.
한국사회에서 죽음은 언급불가 대상이거나 금기어로 여전히 인식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장수인구의 등장이 제기하는 죽음과의 모호한 대면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분명한 관점의 생성을 요구한다. 삶의 존엄성 보장과 의사결정의 자율적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걸음마 단계의 죽음 관련 논의가 시작되고 있기는 하다. 서구중심으로 시작된 존엄사나 조력 자살 등의 사례 연구와 '웰 다잉(Wel-dying)'도 학계를 중심으로 공론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명치료 관련 논의는 세계적 관심사 중의 하나로서 생애말기의 신체통제권을 누가 행사하는 것이 타당한 지와 환자나 보호자의 의료자율성이 어디까지 보장돼야 하는지가 주요 쟁점이 된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지닌 주체로서의 자립성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하는 존엄성이 침해되지 않는 선택이 중요한 반영요소가 될 것이다. 장수인류가 주도하는 시대를 맞아 죽음까지도 포용하는 '생애주기(Life Cycle)' 해석의 새로운 범주와 기준이 필요해진다. /신천식 배재대 특임교수·행정학 박사·도시공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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