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래 대전 유성구청장 |
위기를 막아낸 건 이번에도 시민이었다. 계엄 선포 직후 밤잠을 이루지 못한 시민들은 국회로 향했다. 거리에서 응원봉을 들고, K-팝을 부르며 대통령 탄핵을 외쳤다. 2016년 탄핵 집회의 주축이 40~50대였다면, 이번에는 20~30대였다. 비상계엄 선포 6시간여 만에 해제 선언, 11일 만에 대통령 탄핵안 의결을 끌어냈다. IMF 외환위기, 코로나19 팬데믹을 이겨낸 성숙한 시민의식의 힘이었다. 전 세계가 우리의 민주주의 회복력을 보며 감탄했다. K-팝을 넘어 K-데모크라시를 과시한 순간이었다.
지난 10일, 한강 작가는 노벨상 시상식 무대에 섰다. 작가는 4·3 제주항쟁, 5·18 광주항쟁 등 국가 폭력과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 세계를 인정받아 노벨문학상 수상했다. 시상식에 앞서 열린 강연에서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며 던졌던 질문을 소개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는가?" 일주일 전 시민들이 무장 군인과 장갑차를 막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본 우리는 이제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현대사의 변곡점에 서 있다. 더 나은 미래로 전진할 것인지, 과거로 퇴행할 것인지의 중요한 갈림길이다. 벌어지지 말아야 했을 불행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덕분(?)에 그동안 잊거나 외면하고 살았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민주주의, 헌법과 평화, 원칙과 상식 등과 같은 담론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의 소중함도 새롭게 다가온다. 비상계엄 시국에 열린 간부회의 때마다 구민들의 일상 회복에 전념하자고 당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며칠 후면 2025년 을사년(乙巳年)의 새해가 시작된다. 12·3 비상계엄 사태의 후폭풍은 끝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여진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정치,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불확실성과 불안감도 여전하다. 경제는 오래전부터 사실상 계엄에 준하는 심각한 상황이다. 어느 때보다 막중한 책임감과 비상한 각오로 구정에 임하고자 한다. 민선 8기 핵심 키워드인 4대 혁신을 구체화하는 일에 속도를 내면서도 구민의 일상 회복과 유지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서민경제를 살리는 동시에 위기 대응력 강화에 주력할 계획이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신 만난 우리." 2024년 12월 광장을 덮었던 소녀시대 노래 '다시 만난 세계'의 일부다. 고백하자면 이 노래를 잘 알지 못했다. 지금도 잘 따라 부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뜨겁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결국 강력한 연대와 협력이라는 교훈을 떠올린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동시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한강 작가의 또 다른 질문에 대한 답도 알 것 같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둠이 깊다. 하지만 희망찬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려 한다. 동틀 무렵이 가장 어둡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2024년 우리가 다시 만난 세계가 그렇듯, 2025년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도 과거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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