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석 소설가 |
21세기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이룩했다고 자부하는 한국에서 대화와 타협, 선거를 통한 국면 타개가 아닌 총을 든 무장군인이 국회에 난입한 사건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암담했다.
야당의 빠른 계엄 해제 의결 처리와 국회 앞에서 육탄으로 계엄군을 막은 시민들의 희생정신, 민주시민 교육을 받고 자란 젊은 군인들의 소극적인 태세가 합쳐, 비상계엄 사태가 불발로 끝나기에 망정이지 국회의원이 끌려가고, 우발적인 총성이라도 울렸다면 이 나라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비상계엄 사태의 정점에 서 있는 윤 대통령은 '그날'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지금은 국회의 탄핵 가결로 대통령직이 정지된 상태지만 여전히 국민 마음속에는 여진이 남아있다. 내란 선동을 하고도 너무나도 당당한 그의 태도에 또 뭔 꿍꿍이를 꾸미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기 그지없다.
요즘 SNS에 '비상계엄령'을 풍자한 말 중에 '나는 사랑 때문에 OO까지 해봤다. 답은 계엄', 이란 표현이 '좋아요'를 많이 받고 있다. 그날, 야당의 집요한 '김건희 여사 특검법' 공세에 빡쳐서 주먹을 한 번 휘둘러 본 것일까? 윤 대통령의 그간 태도로 본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 직하다. 윤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관련 담화(11월7일 명태균-대통령부부 불법선거개입 의혹 관련)에서 "대통령 부인이 대통령을 도와 선거를 잘 치르고 국정도 남들에게 욕 안 먹고 원만히 하길 바라는 일을 국정농단이라 한다면 그건 국어사전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다"란 말을 한다. 국민의 상식을 뛰어넘는 그의 말 위에는 농염한 감정선마저 흐른다. '이 오빠가 대통령직을 걸고서라도 널 지켜줄게!' 하는 '희대의 로맨티시스트'인가 싶은 느낌을 받게 했다. 그런데 이건 애교 수준의 표현이고, 정작 드러내놓고 한 행동은 '계엄'이란 방식의 폭거였다. 근대 이전에나 가능한 '폭군'의 모습이었다.
15세기 프랑스에서도 폭군은 있었고, 당시 법률가였던 라 보에시는 <자발적 복종>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라 전체가 폭군에 대한 복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그런데 이 간단한 처방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들은 오히려 시민으로의 자유를 물리치고 스스로 굴레를 찬다.' 이런 현상을 라 보에시는 '자발적 복종'이라고 불렀다. 민중의 오래된 노예적 관습과 이념적 편향-오늘날에는 극우, 보수, 진보, 좌파 등으로 불린다-이 역설적이게도 민중을 폭정의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다.
보수의 가치는 나라의 안녕과 헌법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이다. 이것을 망각하면 이념적 편향에 휘둘려 극우적 선동가인 '희대의 로맨티시스트인 폭군에게 자발적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날'의 사건은 '자발적 복종'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도 이념적 편향에 빠지면 얼마든지 망상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시민들이 자각했다. 어쩌면 '그날'의 사건으로 이 시대가 우리에게 '자발적 복종'이 아닌 '자발적 각성'으로 깨어나길 요구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똑똑한 지도자가, 정부가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외면한 사이, 세계는 기후위기와 전염병, 무역전쟁, 더 나아가 세계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K-문화를 넘어 K-스피릿(시민정신)으로 세계인이 놀랄 상생문화를 한국인이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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