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출산휴가가 존재하였다. 『세종실록』50권, 12년 10월 기사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는 출산휴가가 단 7일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제4대 국왕 세종(世宗, 재위 1418∼1450년)은 산모에게 7일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출산 전 30일, 출산 후 100일로 총 130일의 출산휴가를 보장하였다.
『세종실록』50권, 세종 12년(1430년) 10월 기사 중 "산기에 임박하여 복무하였다가 몸이 지치면 곧 미처 집에까지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다."라는 대목은 세종이 출산 이후의 상황만 인지한 것이 아니라 출산이 임박한 산모의 형편까지 헤아렸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비단 여성 노비뿐만 아니라 산모의 남편에게도 30일 육아휴직 기간을 보장하였다.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아니하고 그전대로 구실을 하게 하여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되니, 한갓 부부가 서로 구원(救援)하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혹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구실을 하게 하라". 오늘날 남성들의 육아휴직 제도와 매우 흡사하다. 다만 세종이 펼친 출산 장려책은 관가에 속한 여종, 즉 일부 하층민에게만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여 년 전에 출산과 육아에 관한 복지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은 21세기에 보아도 파격적인 복지가 아닐 수 없다.
(그림 1) 조선시대 육아모습, 左. 조영석, <새참>, 『사제첩』 일부, 개인소장, 中. 김홍도, <점심>, 『풍속화첩』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右. 김홍도, <훔쳐보기>, 『행려풍속도병』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16세기 중엽 선비 이문건(1494∼1567)의 『양아록』은 직접 손자를 보살피며 기록한 조선시대 유일하게 남겨진 육아일기이다. 『양아록』은 양반가 집안의 육아 과정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남성들도 자녀 양육에 있어 여성과 같이 커다란 몫을 차지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21세기 대한민국 직장인은 육아휴직 1년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은 높지 않다. 남성들도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돌보고 싶은 마음은 조선시대나 21세기의 지금 그리고 더 나아가 여성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는 여성이 출산으로 휴직을 하면 대신 일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취업이 어렵다는 점, 남성들은 유무언의 압력으로 인해 선뜻 휴직 신청이 어렵다는 것이 현실이다.
2024년 12월부터 전북특별자치도에서 '가족 친화형 당직 근무제'를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안정적인 자녀 돌봄을 보장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으로, 만 8세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를 둔 여성 공무원은 당직 편성에서 제외시키는 새로운 제도이다. 제도운영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남성 공무원이 배제된 것은 성별 간의 차별적 육아 분담이라는 과거의 사고방식이 답습되어 나온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출산휴가에 대해 악용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한 여성이 출산임박 사실을 숨기고 입사 40일 차에 출산휴가 신청서를 내었다. 이 여성은 전 직장에서 임신 사유로 부당해고를 당해 합의금을 뜯어냈는데, 여기서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협박성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법적으로 입사 180일 내 육아휴직 사용 시 회사는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 반면 출산휴가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즉 이 여성은 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것이다. 저출산 시대에 임신은 분명 축복받을 일이다. 여성에게 필요한 복지를 악용하는 것은 정상적인 여성에게 피해를 입힐뿐더러 여성혐오에 한 발짝 다가가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복지국가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국가들이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새롭게 제정된 '2025 육아휴직 사용률 공시 의무화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해 개인과 가정은 물론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와 일과 가정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가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최정민/평론가
최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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