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만학도들의 한글공부

  • 오피니언
  • 교단만필

[교단만필] 만학도들의 한글공부

서천교육지원청 장학사 이미선

  • 승인 2024-12-13 12:25
  • 신문게재 2024-12-13 18면
  • 이현제 기자이현제 기자
20241212_서천교육지원청 장학사 이미선
이미선 장학사
주말에 가까운 지역에 있는 주민자치센터를 들렀다. 주민자치센터에 전시되어 있는 서툴고 꾸미지 않은 초등학생 정도의 시화를 보면서 어린이집에서 시화전을 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화의 주인공들은 연로하신 할머니들의 작품들이었다. 알고 보니 지역에 있는 평생학습관에 다니는 할머니들이 자작시와 그림을 직접 그린 시화들이라고 하였다.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이 글을 배우고 나서 직접 쓴 시를 정겹고 아기자기하게 꾸며 전시하는 자리라 가족들과 지인들이 축하와 격려를 나누며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문득 7년 전 교사일 때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인근에 사시는 문해교실 할머니들과 함께했던 한글수업이 생각이 났다.

나는 그 때 마을교육 담당교사로 마을 자원을 활용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해교실 강사님이 전화를 해서 할머니들이 학교를 방문할 수 있는지 문의를 했다. 할머니들은 평생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어서 학교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가득하다고 했다. 날짜를 잡고 학교에 오신 할머니들은 93세의 고령의 할머니부터 78세의 가장 젊으신 할머니까지 그 연령대가 다양했다. 심지어는 걷는 것조차 힘겨워서 다른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분도 계셨다. 교정을 따라 걸어오시는 할머니들의 눈빛은 갓 들어온 1학년 입학생들처럼 설렘과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할머니들은 한글 해득 수준에 따라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고루 나누어 교실로 안내됐다. 1학년의 'ㄱ', 'ㄴ'부터 6학년의 동화책 읽기까지 할머니들은 각자의 수준에 따라 초등학생들과 수업을 받았다. 쉬는 시간에는 아침밥 먹기 활동을 이용하여 서천쌀로 만든 백설기와 식혜도 드셨다. 학생들 몸집에 맞는 책상과 의자, 가방과 학습용품을 쓸어보면서 한없이 부러운 눈길을 주셨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공부하는 너희들은 정말 복받은 아이들이다"며 "나도 어릴적 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여자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며 안 보내주셨다"는 할머니와 "전쟁통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할머니 등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각자의 사연들을 말씀하셨다.



할머니들은 마을회관에서 운영하는 문해교실을 다녔다. 일주일에 두 번 운영하는 문해교실의 회원들은 총 30여 명인데 별 탈 없는 한 대부분이 참석하신다고 했다. 공부한 내용을 기억하는 시간이 짧을지라도 할머니들은 한글공부를 열심히 하신다고 했다. 글을 배운 후 읽을 수 있는 글자와 간판 등을 보면서 한없이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강사님을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라 부르며 우리 반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따르셨다. 그 후로도 할머니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학교에 오셔서 수업을 받았고, 학습발표회나 운동회 때도 초대하여 교육활동에 참석하도록 했다. 또 강당에 마련된 임시 영화관에서 아이들과 손을 잡고 영화도 함께 관람했다. 할머니들 역시 추석 즈음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오셔서 아이들과 송편빚기를 하셨다. 면학의 즐거움은 다른 어떤 것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할머니들의 열정은 그 후에 시화전을 열고 발표회 개최로 이어졌다. 아이들 또한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어른에 대한 공경심, 학교생활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칠판에 나와 분필로 자신의 이름을 쓰고 환하게 웃으시던 할머니의 함박미소가 떠오른다. '학교가 마을속으로, 마을이 학교 안에'라는 구호가 있지만 정작 마을과 학교는 가까운 듯 조금은 거리를 둔 관계였던 그 때, 나는 우리 아이들과 나이 많은 늦깎이 학생들과 함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연필을 꾹꾹 누르고 이를 앙다물며 한 글자 한 글자 예쁘게 쓰시던 할머니의 아름다운 만학의 모습이 오랫동안 건강하게 유지되기를 희망한다./서천교육지원청 이미선 장학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환경부 장관, 대전시 국가하천 정비 현장 점검
  2. 대전 PC방 실내 흡연 문제 심각…업주 처벌 없어 단속 사각지대
  3. 대전권 한 대학 "수업 중 휴대폰 촬영 제한" 학생들 불만 속출
  4. 국립세종수목원, 2024 '크리스마스의 기적' 이벤트 예고
  5. 탄핵 정국 여파...세종시 '현안 사업' 줄줄이 삭감
  1. 대전 14차 탄핵집회 계속…길어지는 시위에도 열기 '그대로'
  2. 대전도시공사 환경에너지사업소 제21회 금강환경대상 대상 수상
  3. 충남대 학생 121명 "위헌계엄 윤석열 탄핵"… 교수 431명도 시국선언
  4. "앞으로도 지구 생태계 보존, 환경 보호에 앞장서겠습니다"
  5. "휴대전화 맡긴 사이 물건 값 갖고 오겠다"… 전과 148범 또 사기

헤드라인 뉴스


PC방 실내흡연 무법지대… 업주 처벌없어 단속 ‘사각’

PC방 실내흡연 무법지대… 업주 처벌없어 단속 ‘사각’

대전 지역 내에서 금연구역으로 지정된 PC방 실내 흡연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업주에게 돌아가는 처벌이 없고 단속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실내 흡연과 청소년 악용 등의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12일 중도일보 취재 결과, 서구의 한 PC방은 금연구역임에도 불구하고 실내 전체가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흡연 부스가 바로 옆에 마련돼 있지만, 이용객들은 이를 무시하고 종이컵을 재떨이로 삼아 앉은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흡연이 가능한 유성구 한 PC방은 흡연이 가능한 좌석을 나눠서 운영 중이었다. 유리 벽으로 구분된..

대전권 한 대학 "수업 중 휴대폰 촬영 제한" 학생들 불만 속출
대전권 한 대학 "수업 중 휴대폰 촬영 제한" 학생들 불만 속출

대전의 한 대학이 재학생들에게 수업 도중 휴대폰 촬영을 제한한다고 학사공지를 통해 안내했다.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것이 이유인데 학생 의견수렴은커녕 관련 민원도 제기된 바 없어 학생을 위한 규제가 맞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2일 지역대학가에 따르면 A대학은 '수업 도중 휴대폰 촬영은 수업 방해와 학습권 침해가 될 수 있으니 사전에 교수님께 동의를 구해달라' 는 내용의 공지를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대학 수업 중 교수가 칠판을 활용해 작성한 판서 내용이나 PPT 자료 등에 대해 학생들의 휴대폰 촬영을 제한하..

대전 14차 탄핵집회 계속…길어지는 시위에도 열기 `그대로`
대전 14차 탄핵집회 계속…길어지는 시위에도 열기 '그대로'

제14차 윤석열 대통령 탄핵집회가 열린 12일 저녁 7시. 이날도 어김없이 대전 서구 둔산동 은하수네거리에 25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이날 오전 윤 대통령의 담화가 이뤄진 후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에 시민들의 참여도는 더 강해진 분위기였다. 집회가 14회 이뤄지는 동안 경찰들도 매일같이 집회에 참석해 시민들을 지켰다. 대전경찰청 경비경호계 기동대를 비롯해 둔산경찰서 경비교통과, 치안정보안보과 등 200여 명의 인력이 보름 가까이 이어지는 대규모 시위에 교대근무 없이 모두 집회장으로 출동하고 있다. 시민들이 모일 광장이 없는 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충청지역 교수들, ‘윤석열과 공범들을 탄핵 처벌하라’ 충청지역 교수들, ‘윤석열과 공범들을 탄핵 처벌하라’

  •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 ‘윤석열 대통령 즉각 체포하라’ ‘윤석열 대통령 즉각 체포하라’

  • 멈춰 선 열차와 쌓여 있는 컨테이너 멈춰 선 열차와 쌓여 있는 컨테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