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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한 대전대 교수 |
2024년도 노벨 문학상 위원회가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 생명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이다. 지금 지구상에는 몇몇 전쟁들이 무고한 목숨을 담보로 진행되고 있다. 보편적 가치를 중시해왔던 노벨 위원회가 이 살육의 현장을 외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작가 한강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 직접 체험한 세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아픈 현장을 외면할 수 없어서, 아니 당연히 참여해야만 하는 의무감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작가는 그 현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학적 장치를 고안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꿈의 형식이다. 그러니까 꿈은 작가가 과거의 현실과 현재의 감성적 볼펜이 만나는 주요 통로인 셈이다.
작가는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접목된 과거의 역사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거기서 작가는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그릇된 욕망을 위해 저질렀던 무자비한 학살, 권력의 부당한 행사를 목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상처를, 그 트라우마를 분수처럼 뽑아낸다. 상처란 그것의 드러냄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치유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폭력에 의해 저질러진 피해자가 생겨나면 그를 적극 보호하게 된다. 그래서 2차, 3차 가해니 하는 말의 성찬을 쏟아내며 가해자의 모습이나 그의 입장에 선 담론들을 적극 지우고자 한다. 그런데 제주 4.3 사건이나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런 보호 테두리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계속된 상처들이 정치적 무의식(political unconsciousness)이 되어 켜켜이 쌓여 왔다. 결코 환기하고 싶지 않은 가해자의 얼굴을 통치자라는 이름으로 7년여를 소름돋게 보았거니와 그 이후로도 그 잔영은 삭제되지 않은 채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었다. 어느 신문 기자가 이렇게 쓴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 가해자는 정치는 비교적 잘했다"는 대선 후보의 말을 전하면서, 이를 두고 "보수의 표심을 자극했다"고 했다. 선거 또한 이에 어느 정도 부응했다. 그렇다면 보수란 반대편의 사람들이 학살되고, 그리하여 생명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아무렇게나 짓밟혀도 좋다는 뜻인가. 이런 망발이 난무할 때 관련 단체 외 어느 집단도 이를 2차, 3차 가해라고 눈을 부릅뜨고 항의한 적이 있는가. 피해자들의 무의식에 쌓이고 쌓인 분노가 '소년'으로 환생하여 이 부당한 현실에 대해 항변한 것이 '소년이 온다'이다.
한강은 이런 야만적인 현실에 펜으로써 저항한 것이고, 노벨 위원회는 작가의 그런 저항 정신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문명 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원시적 야만이 존재한다. "개는 패서 죽여야 맛이 있다"는 근거없는 통설에 기대어 개가 죽을 때까지 차에 매달고 달리는 야만과, '다름이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물리력으로 제압하려는 군사 문화의 야만('채식주의자'). 그리고 생명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이념이나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포기되는 야만의 현장이 목격된다('작별하지 않는다').
노벨위원회는 한강의 작품을 통해서 이 부당한 사건들이 그들만의 것에서 그치지 않는 것임을 알리고자 했다. 차단된 바위섬이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사의 공간으로 거듭 태어났기에 이제 한강은,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이 아픈 역사들과 작별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는, 광주는, 호남은 이제 더이상 울지 않아도 된다. 생명 모독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훼손이 그저 남의 일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 이런 단면이야말로 우리가 서구의 문명국과 대등한 위치로 편입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 땅의 이런 야만적 현실을 한강의 작품을 통해서 경고한 것, 그것이 이번 노벨 문학상이 주는 구경적 의의이다. /송기한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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