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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형 대전을지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2000년대 초 영국 왕립의학회에서 의사를 대상으로 300년 근대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은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했다. 르네상스 이후 신학에서 인간 본연의 탐구로 시작된 철학적 사유는 자연, 우주, 인간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화학, 물리학, 생물학 등의 학문 분야가 생성됐고 이어서 1700-1800년대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인류 최초의 거대한 생산성 향상이라는 풍요로움을 가져왔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당연히 의학에도 적용돼 획기적인 약물이 개발됐고, 인간 몸체에 대한 연구를 촉진해 현대의학에 이르렀다. 이러한 의학발전을 되돌아보며 지난 300여 년 중 의학발전에 기여했다고 선정된 10대 발명은 히포크라테스와 의학의 탄생, 공중위생, 세균, 엑스선, 백신, 항생제, 유전과 DNA, 정신질환 치료제, 그리고 '마취'이다.
10대 의학발명 중 수술이 아닌 마취가 선정된 결과에 의아하기도 할 것이다. 마취통증의학 전문의이며 교수인 본인도 이 설문결과에 대해 쓰인 책자를 보기 전까지는 마취가 그렇게까지 중요한지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자. 20세기 후반에 흔했던 서부영화나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전쟁 장면을 보면 수술은 이미 근대의학 이전 시대부터 행해왔던 의료행위다.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사고나 전쟁 등으로 항시 손상과 질병에 노출돼왔고 어떠한 방법으로든 이것을 해결하려 했다. 상처에 뜨겁게 달군 쇠로 살을 지져 아물게 하는 방법부터 독한 위스키를 먹여 의식을 떨어뜨린 다음 몸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법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도 나왔던 익숙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수술법은 환자가 수술 중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수술로 인한 통증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수술다운 수술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수술 결과도 좋지 않았을 것이다. 수술을 위해 날카로운 칼로 피부를 절개할 때 오는 통증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오금이 저려온다. 아무리 수술적 기술이 좋고 재주가 하늘을 찌른다 한들 수술로 인한 통증이 있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된 수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846년 10월 16일, 미국 보스턴의 메사추세츠 병원의 몰턴이라는 의사는 에테르를 사용해 최초로 전신마취에 성공했다. 통증 없이 하악 종양을 수술한 것이다. 주변 의사들과 의과대학생들이 참관한 공개 석상에서 인류의 의학사가 한 걸음 나아가는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는 상태로 수술을 할 수 있다는 것. 아니, 환자가 통증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지난 수백 년간 의료계에서 꿈꿔오던 이상적인 순간이었다.
최근의 마취방법은 마취상태에 빠르게 도달하고 마취에서 일찍 깨어나는 우수한 약제의 개발로 에테르 마취보다는 훨씬 효율적이다. 나아가 마취 중 환자의 혈압, 맥박, 호흡, 마취 깊이 등을 관리하는 여러 장치를 통해 무엇보다도 환자가 안전하게 마취와 수술을 받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고통 없이 수술받을 수 있는 마취방법이 개발된 지 3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약 1만 년으로 추정한다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세대로 계산해도 약 10세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다. 오늘 이 세대에 태어나 고통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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