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양란 이후엔 단순한 개인의 학문이나 연구, 수양의 방편이 아니고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확립하여 나라의 기강을 반석 위에 올려 놓기 위한 경세(經世) 사상이 그 핵심이었다.
그래서 선비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민본을 바탕으로 한 경세 능력과 출처 대의를 먼저 따졌다. 율곡(栗谷), 구봉(龜峯), 사계, 신독재(愼獨齋) 선생이 그랬고 우암(尤菴), 동춘(同春), 초려(草廬), 미촌(美村), 시남(市南) 선생 등 충청 5현이 모두 그랬다.
어진 인간성을 바탕으로 사리사욕에 물들지 않고 세상의 지속적인 관심과 책임의식을 가질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인간의 본성은 인의지만 그 본성을 체계적으로 사회화하여 일상생활에서 예제를 제정하고 다시 그 예제를 근거로 국가사회의 법제(法制)를 시행하는 왕도정치를 추구할 것을 역설했다. 이렇게 개인의 도덕과 양심을 회복하고 정의를 옳고 바르게 실천하게 되면 그것이 건강한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만들 수 있디고 보았다.
조선 500년이 유지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 선생의 사상과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른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던 선생의 고매한 뜻을 되새기는 것은 개인의 호사(豪奢)가 아니다. 선생이 살았던 시기는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다. 1575년 동서분당, 1589년 기축사옥 그리고 1592~1598년 임진왜란 1613년 계축사옥, 1623년 인조반정과 1627년 정묘호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산림(山林)의 종장(宗匠)으로서 그리고 한 시대를 담당할 주체로서 홀로 부단한 삶을 영위했다.
17세기 전쟁의 포화에서 겪은 성리학은 이미 무너져 버린 국가를 재건하는 지도이념과 사회질서 이념으로서 충분히 기능하지 못했다.
이 때 선생은 사회혼란을 막고 국가 재건의 주요 방법으로 강상(綱常)과 오륜(五倫)을 되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강상의 강(綱)은 군신, 부자 등 인간관계를 의미하고 상(常)은 언제나 변함없는 삶의 가치를 의미한다. 오륜은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 장유(長幼), 붕우(朋友) 등 인간관계의 핵심적인 윤리관계를 정의했다.
즉, 17세기는 강상과 오륜을 지킴으로서 국가와 사회의 안정된 기강을 확립하려 했고 그 방법을 예절의 보급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했다.
그 중심에 사계선생이 계셨고 그 제자들에 의해 그 뜻과 정신이 계승되었으며 예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를 재편성하게 되었다.
선생은 이러한 국가적 난제 속에서 한국 예학의 종장으로 국가를 재건하고 인의(仁義)를 중심으로한 인간과 인륜과 예의가 바탕이 된 그런 사회를 이루려고 헌신하였다.
요즘 같이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땐 선생의 삶을 다시 되돌아 보고 이해관계나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민생을 중심으로한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지도자는 없는지 따져 물을 일이다.
벌써 차기 대권 주자 운운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사람이 없는지를 묻는 것은 내 주위에는 흔한 이야기가 됐다.
이미 광복 79년을 맞는데도 우리 주위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인사들의 목소리만 커진다. 사계 선생을 위시한 충청 5현들이 계시면 뭐라 말씀하실지 궁금하다. 그래서 더 부끄럽다.
이연우/충남도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이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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