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일 북-칼럼니스트 |
진료를 마친 후에 기분 전환에 좋을 듯싶어 중촌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상에 내려 앉아 바람에 쓸리는 낙엽을 밟으며 걷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든다. 이 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는 <토지> 박경리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왜 일까? 방금 전 "세월이 가져다 준 상처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이제는 고쳐가면서 같이 가야지요"란 의사선생님의 잔음 때문일까. 갑자기 불어 닥친 찬바람이 몰고 오는 숙살지기(肅殺之氣) 때문일까. 아님 낙엽 속에 올 해 겪은 풍진과 같은 이런저런 일(이야기)들이 요런 저런 사유의 파편이 되어 가난해진 심신을 두드린 탓 일까?
뭐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기 마련이다. 시야를 넓고도 깊게 보아야 할 '노모를 누가, 어떻게 섬길 것인가 라는 문제'를 정리해야 하는 이런 일, 조카의 '대학 진학 문제'로 상의를 구하는 막냇 동생에게 유연하게 다양한 원리를 섭렵할 기회를 줘야하지 않을까라는 수용이 의문시되는 응답을 해야 하는 저런 일, 지난 6년여 동안 해 오던 '평생 교육기관에서의 강의여부 문제'를 플러스-마이너스 양극단 중 어느 한 쪽에 기울기를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요런 일, 며칠 내에 편집 마감해야 할 책자의 목차를 정하지 못해 이 원고 저 원고를 넣고 빼는 일, 갖가지 일들이 손가락으로 세기가 부족하다.
세상사. 바람결에 티끌인양 무심히 내몰아 흘려보낼 이런 일도 있지만, 삶의 지반을 지켜줄 단단한 일이기에 어떻게든 섬겨야하고, 지켜야하고, 바로 세워 다스려야 할 저런 일도 있다. 삶의 모습처럼 일의 빛깔과 냄새는 좋든 나쁘든 다변적이기에, 이런 다양성을 지닌 세상사의 지극한 사리(事理)를 그냥 간과할 순 없다. 그 사리의 처음과 끝은 선택이다. 선택은 스스로의 방향을 정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문제로 고민하는 일은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선택 과정에서의 진지한 고민은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 특히 내가 택한 길이 가시밭길 일 때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터널을 빠져나와 되돌아보면 삶의 의미가 더욱 충만해졌음도 또한 사실이다.
여기서 셰익스피어 극에서 햄릿의 독백을 패러디 해보자. "선택은, 곰곰이 새길 경우, 일부만 현명하다./그리고 언제나 4분지 3은 겁쟁이다. (…)맞아, 선택의 결과는 /선택에 대한 명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선택의 과정에선 지푸라기 하나를 놓고도 위대하게 싸우는 거다, 나의 운명이 걸려 있다면."(4막 4장) 즉 자신이 선택했다면, 자기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지푸라기 하나를 놓고도 위대하게 싸우지'만, 통제 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받아들이자는 사유의 질문이다. 요런 물음은 사유의 틀 일 뿐만 아니라, 선택명제의 궁극적 기능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대등한 두 현상을 나침반 삼아 열린 생각의 제 3의 길을 열 수 있게끔 돕는 일이다.
삶도 그럴게다. 이런 저런 일의 선택의 기로에서 사유와 실행의 기준이 모두 다르듯 적절함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을게다.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자기 성찰이 중요한 이유다. 타인과의 비교가 바람 불 듯 일상인 세계에서 우리는 계속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나름의 척도과 중심을 익히면 휠지언정 꺽이진 않을 것이다. 인생은 매번 흔들리면서도 나름의 중심을 찾는 과정이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이 때. 삶은 '앎의 양이 아니라 선택의 장에서 의심하며 깨친 사유의 질이다'라는 산책의 아포리즘을 선물로 얻었다. 자박자박 낙엽 쌓인 조촐한 숲길이 좋았고 냄새도 좋았다. 그래 이런 저런 일 겪어내느라 한 해 수고 많이 했고,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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