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이나 의식에 세대차가 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짚어주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가 공부, 배우고 익히는 이유는 첫째로 지식을 쌓거나 정보를 얻기 위함이요, 궁극적으론 변화를 만들어 가기 위한 것이다. 학습과 다른 점은 자발적인 면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공부하는 목적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공통적으로 지향해야 알 바는 진리를 탐구하고 밝히며, 더불어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삶이 영위될 수 있도록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그것을 <대학> 첫 문장은 밝히고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고, 모두가 새로워지는 것이며, 지극한 선에 이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행복으로 생각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논어 학이>"란 공자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성취, 성장의 기쁨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뿐인가? 배움은 인권 확보의 교두보이며, 기본 인권이자 권리이다. 풍요롭고 인간답게 사는 첫걸음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이다. <논어 위령공>에 전한다. "내가 일찍이 온종일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고 생각하였으나 유익한 것이 없는지라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도다." 때문에 배움에 대한 의지도 대단하였다. <논어 이인>에 이른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셋째로 배움은 시행착오를 줄여준다. 앞사람이 한 사고나 행태, 경험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한다면 지적 발달이나 물리적 발달, 확장은 요원 할 것이다. 배움으로서 대신하기에 날로 진보가 있는 것이다.
자주 언급했던 말이다. 사람은 세 가지 만남에 의해 배움을 얻는다. 사람과 자연,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예술품을 포함한 모든 저작물에서 만날 수 있다. 시공을 초월한 만남이다. <대학>에는 "사물의 이치가 궁극에까지 이른 다음에 내 마음의 지식이 극진한 데 이른다." 했으며, <논어 술이>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나니 그 중 착한 자를 쫓고, 선하지 않은 것은 고쳐서 배워라" 이른다. 모두가 스승이란 말이다.
앞의 둘도 자신과 만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저 스치는 바람에 불과하다. 자신의 일과 마음을 살피는 성찰도 포함된다. <논어 위정>에 이른다.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따르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분별이 없어 악의 수렁에 빠질 수 있다.
앞에 가는 사람 말이 결코 구태의연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하고 싶은 말을 옛글로 대신해 보았다. 더러는 남존여비, 가부장적 권위주의, 도덕 지상주의, 명분 위주의 윤리관과 같은 측면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거부 대상만 있는 것도 아니다. <논어 헌문>에 공자 이르기를 "옛날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였는데 오늘날 배우는 사람은 남을 위한다." 하였다. 어렵다. 정자가 해석하길 옛 사람 공부는 도를 자기 몸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오늘날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공부한다는 뜻이라 한다. 모든 사물과 일에 관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소통하고 배운다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정신과 행동이 모아지면 문화가 된다. 어떤 분위기에서 살 것인가? 대단히 중요하다. 한 사람의 행태가 때로는 지대한 영향을 준다. 폭풍이 되기도 한다. <대학>에 이른다. "한 집안이 어질면 한 나라에 사랑이 일고, 한 집안이 양보하면 한 나라에 사양함이 일어나며, 한 사람이 어그러짐을 탐하면 한 나라가 혼란해 지나니, 그 빌미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 말이 일을 뒤엎고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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