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도솔산 월평공원에 바위가 일제강점기 금 재취 위해 절단되어 직각의 벽처럼 노출되어 있다. (사진=임병안 기자) |
6일 일제강점기 금 수탈 현장이었던 월평공원의 수직갱도와 동굴형 갱도에 대한 주민 설문 과정에서 광복 직후에 금광을 목격한 원로를 만날 수 있었다. 서구 정림동 명암마을에 거주하는 박남원(88) 옹은 중도일보와 만나 광복 전에는 채굴이 이뤄지는 쪽으로 얼씬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당부가 있었고, 광복 후 갔을 때는 폐석이 동굴 입구에 쌓여 있을 뿐 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박 옹은 "9살에 광복을 맞았는데 그때까지 어른들이 굴이 있는 광산 쪽으로 얼씬 못하게 해서 가본 적은 없었다"라며 "광복 직후 초등학교에 입학해 소풍으로 도솔산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동굴의 금광을 보았고 아무런 시설물 없이 잔돌들이 입구에 잔뜩 쌓여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1937년 정림동 명암마을에서 출생해, 지금의 호수공원 부지와 하천 부지로 바뀐 억새밭 자리에서 벼농사를 짓는 등 줄곧 고향을 지켜왔다.
박 옹은 월평공원의 금광이 문을 닫은 때는 일제가 패망하기 전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당시 굴을 파고 돌을 운반하는 일에 동원됐을 근로자들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월평공원에 금광을 운영한 조선제련(주)이 1936년 준공한 장항제련소가 한때 조선총독부의 금 생산 독려에 힘입어 대전을 포함해 전국 10여 개 금 광산에서 광석을 가져다 금을 녹였으나, 산금정책이 백지화한 1943년부터 전국 금산이 폐광한 사실과 박 옹의 증언이 부합한다. 다만, 캐어낸 돌을 분쇄하는 작업장까지 이곳에서 운영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고 기억하면서 채굴한 돌을 어떻게 운반했을지는 짐작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마을 앞에서 채굴 현장까지 이어져 월평동까지 관통하는 지금의 산책길은 광복 이후에 개설되었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박 옹은 "동굴을 파서 금을 캐는 일은 이 주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테지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없었다"라며 "마찬가지로 금 광산이 있다고 해서 누가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도 없었다"라고 밝혔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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