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열 수필가 |
잘 사는 만큼 우리 삶에서 여유와 품격이 따라가야 하는데 곳곳에서 암울한 소식이 끊어지지 않는다. '묻지마 범죄', 음주운전 사고, 딥페이크 성인물 유포, 마약 범람, 독기 가득한 말들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대로 간다면 과연 우리 공동체의 지속성이 유지될 수 있을는지.
경제와 K-문화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다. 그런데도 왜 비이성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날까. 누군가는 욕망 실현의 지나친 경쟁사회에서 오는 긴장감이 큰 데서 원인을 찾는다. 카카오톡과 유튜브로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고 인스타그램은 욕망의 긍정을 부추기니 좌절도 커진다. 자기 생각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지거나 자칫 왜곡된 정보에 사로잡혀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11월이다. 나뭇잎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조용히 대지로 떨어지고 있다. 그동안 욕망 앞에 부산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관조해보자. 희망을 따라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을 덜어보자. 한 해를 가늠하며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 사이에서 조율하며 절제하는 마음을 가져보자. 절제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밖으로 뛰쳐나간 마음을 다시 내부로 돌리는 행위다. 절제는 자각의 힘으로 키워야 하며,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독서가 있다.
학창 시절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다. 날씨가 선선해 책 읽고 사색하기 좋은 계절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보고 즐길 것이 너무 많고 변화의 속도 또한 너무 빠르다. 책을 읽으며 사유의 공간으로 들어가 나 자신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게다가 스마트폰이 펼치는 가상세계는 단단한 감옥처럼 우리의 생각을 가둔다. 우리는 스마트폰에 갇힌 벌레로 변신한 것은 아닌지.
결국 문학의 숲에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9월 말, 30여 년을 향토서점으로 버틴 계룡문고가 끝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문을 닫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독서인구가 줄고 온라인 판매 영향이 컸을 것이다. 지역과 숨결을 함께 한 서점이 사라짐은 우리 가슴에 머문 추억이 하나 사라지는 것과 같다. 지금부터라도 그 장소를 문학의 향기가 퍼지는 책의 공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다.
뜻밖에도 놀라움의 경사가 스웨덴으로부터 날아왔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같은 시기라 묻히기는 했지만, 재미교포 김주혜 작가는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았다. 명실공히 우리 언어로 일군 문학의 깊이와 넓이를 세계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20세기를 어느 나라보다 격동으로 보낸 한국의 문학적 토양에 비추어보면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이제부터는 평범한 우리 삶 속에서 문학의 접점을 넓혀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달랑 두 장 남은 달력이 낙엽처럼 가볍다. 만물은 서서히 대지의 색으로 동화되어 간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숙연해진다. 이럴 때 MZ세대에 유행하는 '텍스트 힙(text-hip)'이란 말처럼 평소 읽고 싶었던 책 한 권 들고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서 문자로의 멋진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한 권의 책은 별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뜻밖에 나의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문장 하나 만나게 할지 모른다.
미래가 뿌연 안갯길 같아 막막할수록 마음속 길라잡이가 되는 등대 같은 문장이 하나쯤 있다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저마다 내면의 등대에서 켜지는 불빛들이 서로서로 비춘다면 인생길은 그럭저럭 버틸만하지 않겠는가. 책 속에서 나를 깨우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자신을 가꾸어 가기를. 그런 우리를 서로 응원하기를. 김태열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