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험난한 인생의 풍파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내일과 그 연속된 도정 가운데 선택의 고뇌를 거듭해야 한다. 대개의 삶은 그 물밀 듯 닥쳐올 '시련'의 연속이며 그 '시련'의 견딤은 '사람'에 있다는 것, 그 곁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멜로적인 휴머니즘의 진부함은 사실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알 수 없는 내일, 그래도 삶"이라는 메시지를 나는 오늘의 연극을 바라보면서 곱씹게 된다. 극 중 사내가 말한 '낙상(落傷) 매'가 가리키는 것처럼, 구렁 속을 구르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길어 올리는 삶, 갈등과 시련의 절망 속에서 오늘의 무거운 공(球)을 버텨내며 언덕 위로 굴리고 굴려서 오르는 삶이야말로 값지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대전어린이청소년연극제'가 여덟 살이 되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있는 연극제가 있다는 것이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의 '풍경소리'의 글처럼 대전 시민이 얼마나 이 축제를 많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누가 읽든, 누가 보든 우리의 삶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 과업을 정하고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중촌동 '대전형무소 터'의 우물을 배경으로 굴곡진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우물(달정이)과 버드나무(버들이)를 통해 전쟁의 잔혹함에 대한 이야기를 극화한 폐막작 <달정이와 버들이>(김미정 작, 김수진 연출)를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 홀에서 만난다. 함께 보러 간 딸애에게 우물 아래에서 올려다본 세상을 그려낸 듯한 공연 포스터를 애써 설명한다. 역시 어린 딸에게는 이 이야기가 무섭고 슬프다. 하지만 이제 아이에게도 말해줘야 할 것 같다. 세계는 아름답고 희망에 차 있지만은 않다고 말이다. 부조리하며 무시무시하고 비극적인 오늘의 세계가 오히려 더 가깝게 볼 수 있지는 않느냐면서 말이다.
올해 2회째 치러졌다는 '서산 인물 극 페스티벌'에 대한 활성화 방안을 논하는 심포지엄에 다녀온다. 모든 축제가 그렇듯, 결국은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재원이 있어야 하고. 축제를 벌이는 게 참 쉽지가 않다. 예술가들은 상생을 꿈꾸지만 '희망'과 '현실'은 다르다. 을, 아니, 병, 아니, 정…. 지원이라는 명목 하에 '축제'의 존속은 계속하자니, 안 하자니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딜레마에 있다. 이제 지원 없는 예술제는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지원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축제 만들기'를 위한 방안들을 읽어 가는데 자꾸 말미가 흐릿흐릿해진다. 빗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흐릿흐릿하다. 와이퍼로 닦아낸들 금세 흐릿해지는 저 앞길. 추월 차로로 쌩쌩 달려가는 앞선 차들이 대단해 보인다. 길이 훤하니 저리 휙 앞서 가버리는 것이겠지.
정신없이 안팎을 다니는 와중에, 지역의 한 극단의 마지막 공연날짜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요새는 공연일이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니 조금 늦게 알면 일정을 놓치기가 쉽다. 창작 초연이다 보니 꼭 챙겨볼 작품이었는데, 놓치고 나니 아쉽기 짝이 없다. 남들 보기에, 연극 작품 한 편 놓쳤다고, 뭐 대단한 일인가 할 수 있다. 밥 먹다가 숟가락을 놓고 한숨을 쉬는 나를 바라보는 짝꿍의 시선도 뭐 다르진 않다. 연극 보는 게 무슨 큰 밥줄이 아닌 것을 알아버린 지 오래되었지만, 나는 우리 생활이란 게, 그 대수롭지 않은 수많은 일이 모여 있으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대수롭게 여겼으면 하는 바람을 지니고 있다. 내일도 나는 그 대수롭지 않은 일을 할 것이다. 왕복 예닐곱 시간 족히 걸리는 남도행의 지도를 펼친다. 도로 위에서 대수롭게 여길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보려 얼마나 무던히 애를 쓸 것인가. 장흥 가는 길 차창을 열고 찬바람을 맞는다. '씻김', 그 생의 묵은 얼룩들을 틈틈이 잘 덜어야 돌아갈 때 좀 쉬이 갈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그 욕심은 덜지 못하고 더해만 가는 듯하다.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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