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광 원장 |
지역축제는 요즘 지역 기반 문화산업으로 인식돼 주로 지역경제 발전과 문화 확산 목적으로 개최된다. 그러나 축제는 본래 특정 집단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을 기념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축제는 기념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준비 그 자체도 하나의 중요한 의식으로 여겨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많은 예산을 들여 마련한 문화관광 축제에서 단순히 먹고 마시며 관람하는 것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고 구경하는 것이지 진짜 우리의 축제를 여는 것은 아니다. 이는 추수 후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풍성하게 내어준 하늘에 감사하는 잔치를 벌이는 것이나 지역사회의 전통을 기리는 의식과도 거리가 멀다. 마을 전체가 달려들어 잔칫상을 차리고 놀이마당 한판을 벌일 때야 비로소 우리의 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축제에 가난한 이웃이나 주변의 걸인들을 초대해 대접하며 그 뜻을 기렸다.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해 지역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는 유럽의 대표 축제들은 이제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갖췄지만, 여전히 많은 주민이 준비 과정과 축제의 일원으로 참여해 그들의 삶과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810년 바이에른 왕세자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독일의 옥토버페스트는 지역을 대표하는 14개의 대형 텐트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맛을 살린 맥주와 소시지 등 음식을 제공하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많이 사는 미국 동부에서는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이자 그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을 기념하는 축제가 크게 열린다. 본래 아일랜드에서는 이 성인이 돌아가신 3월 17일을 기념하여 매년 축제를 열어왔는데, 영연방국인 캐나다, 호주보다도 미국 동부에서 이 축제가 유독 크게 열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1840년대 아일랜드의 대기근 시절 미국 동부로 건너와 정착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조상들의 가난하고 팍팍했던 삶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자 자발적으로 많이 참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나름 지역의 역사나 특징을 살린 축제도 있지만, 대부분 지자체의 예산지원에 의지해 우후죽순처럼 열리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유래나 같은 관광자원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고만고만한 콘텐츠의 관광 행사로 전락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축제의 주체인 지역 주민들은 정작 축제 준비 과정과 퍼포먼스에서 소외되고, 전문 기획사가 기획한 화려한 볼거리, 먹거리, 구경거리에 단순히 참여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자체들은 몇십만 명이 방문했느니 경제 유발효과가 얼마니 홍보하지만, 정작 실무자들은 트로트 가수, 아이돌 등 어떤 유명인이 오느냐에 따라 흥행의 성패가 달렸다고 자조한다.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자리 잡은 지역의 대표 축제도 자치단체장이 바뀌고 나면 예산이 깎여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문화예술과 관광 행사를 지역축제로 포장하여 비빔밥으로 만들 바에야 아예 소지역, 마을 단위의 다양한 문화예술행사와 동네 시장 골목상권 시골 장마당을 지원하는 관광 상품을 분리, 특성화하여 활성화되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주민 스스로 만들고 참여하는 문화예술행사를 통해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을 접해 수준이 높아지고 소비가 늘어나면 소수의 유명인보다는 지역 풀뿌리 문화예술인의 설 자리가 많이 생길 수 있다. 온라인사회관계망, 가상현실, 숏폼이 유행하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이웃과 부대끼고 즐기며 천천히 사는 법을 터득해 가는 지역축제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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