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일 사회공헌연구소 대표 |
최근 한국정치의 특성을 지적하라면, '증오정치'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일반적으로 정치는 권력을 추구하는 행위인 만큼 경쟁과 대결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대화와 타협이 함께 이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정치는 오래 전부터 경쟁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경합(agonism)의 정치에서 화해 불가능한 행위자 간의 관계인 적대(antagonism)의 정치로 변질되어 왔다. 지금은 이 같은 증오정치의 수준이 상대방을 괴멸(壞滅)하고자 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 아닌가 본다. 오스트리아의 법정신의학자인 라인하르트 할러는 '증오의 역습'(2022)에서 "증오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어두운 열정"이라고 설파한 바 있는데, 현재의 한국 상황이 이와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증오는 선거국면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된다.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 측이 선거를 이틀 앞두고 박정희 후보의 여순사건 관련 사실을 폭로한 해프닝이나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 측이 노무현 후보 장인의 남로당 활동 이력을 들고 나온 색깔론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같은 형태는 선거 때마다 대동소이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근래 들어서는 시도 때도 없이 불거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썽사납다. 2022년 대선이 끝난지 2년 반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치열하게 경쟁했던 당사자들이 지금까지도 죽자 사자 열전 중이다. 더군다나 이 이전투구에 당사자들의 배우자가 나름의 연유와 빌미가 있겠지만 끊임없이 불러내지고 있는 상황이다. 가히 상호괴멸적이고 수치스러운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정치의 품격을 따지기 이전에 사람의 품위를 거론하는 것조차 민망스러운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나 목표에 따라 생존투쟁, 인정투쟁, 초월투쟁 등의 양상으로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과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생존투쟁을 하고, 정치인은 권력을 얻기 위해 인정투쟁을 한다. 그리고 도인(道人)은 사람의 유한함을 넘어서기 위해 초월투쟁을 한다. 이 중 정치인은 누구보다도 권력의 원천인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그 명예에는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는 전쟁 와중에서도 적장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공격을 삼가는 아량인 금도(襟度)가 있다. 하지만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보통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마저 금도를 잃어버리고 정치를 증오의 열망으로 나락에 빠뜨리는 것이 아닌지 매우 우려스럽다.
현재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증오정치는 차별과 혐오의 정치문화, 승자독식과 배제의 정치제도, 공공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 등에서 배태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들 간의 적대 및 애증 관계도 한몫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같은 증오정치의 사슬을 누가 먼저, 어떻게 끊을 것인가?
아무래도 대통령이 물꼬를 트는 것이 순리이며, 국정 책무성의 측면에서도 우선 순위일 것이다. 또한 여·야당 대표들도 국민의 힘든 삶을 개선하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한 발씩 물러서서 성찰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정치지도자들은 적대와 배제의 증오정치에서 벗어나 경합과 협치의 통합정치의 장으로 나서야 한다. 아마도 이 같은 성찰과 실천 정도에 따라 한국정치의 품격도 그에 비례해 나타날 것이다. 유재일 사회공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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