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를 살피자니, 얽힌 이야기가 아주 풍성하다. 우리말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지만, 조기라는 이름자체가 도울 조(助), 기운 기(氣)다. 기운 차리는 것을 돕는다는 의미다. <어식백세>에 의하면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철분, 무기질이 풍부하여 기력회복에 좋고 비타민 A와 D가 많아 야맹증을 예방하기도 한다. 특히 피로로 지친 몸을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한다." 참조기·보구치·수조기·부세·흑조기 등의 종류가 있다. 오래 보관하기 위해 말린 참조기가 굴비이다. 보리굴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 보름 넘게 바싹 말린 다음, 통보리 뒤주 속에 넣어 보관하여 보리향이 배게 한 것이다. 아예 물에 불린 보리와 보리굴비를 함께 쪄 먹기도 한다. <소설 동의보감>에 의하면, 보리는 겨울 냉기를 머금고 있어 여름에 먹는 것이 제격이다. 대체로 냉차나 찬물에 만 밥에 구운 보리굴비를 곁들여 먹는다. 풍미와 꼬들꼬들한 식감이 일품이다.
영광 법성포는 참조기로 유명하다. 여행 중 법성포 바닷가 식당에서 딸 가족과 함께 굴비한정식을 먹은 일이 있다. 차림이나 식당에 따라 다르겠지만, 굴비한정식에 올라오는 음식은 상상이상으로 푸짐했다. 솥밥과 기본 반찬에 굴비구이, 보리굴비, 굴비젓갈, 매운탕, 간장게장, 양념게장, 모시송편, 광어회, 소불고기, 바지락장, 홍어무침, 갈치구이, 홍어삼합, 병어찜, 새우튀김, 고추장굴비, 마른참굴비, 낙지볶음, 새우장 등이다. 그림으로 본 중국 청조 서태후 수라상이 부럽지 않았다.
굴비란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에서는 "생선을 짚으로 엮어 매달면 물고기가 구부러지는데 그 모양이 '굽었다'를 뜻하는 고어, 구비(仇非)에서 굴비라는 말이 나왔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이자겸(李資謙, 1050?~1126)과 연관, 역경에 굴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이자겸은 고려중기의 권신이다. 문종에게는 고모 셋이, 선종에게는 사촌누이 세 명이 시집가고 누이는 순종의 후궁인 장경궁주이다. 자신의 딸들도 예종과 인종에게 시집보내 왕실과 외척관계이다.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참설을 최초로 퍼뜨린 인물이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말이다. 군부와 정권을 모두 장악,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권세가 강하다고 모든 사람이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불만과 이견 있는 사람 또한 많아진다. 임금도 다르지 않아 인내의 한계점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이자겸의 난이란 1126년 2월 25일 인종에 의해 일어난 친위 쿠데타이다. 난을 평정한 인종은 이자겸파 사람 하나하나 사형, 수장, 유배, 조롱 하였다. 장인과 처가일족은 차마 극형에 처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자겸 일가는 경향각지로 유배하였다. 이자겸과 그의 아내, 5남 이지윤(李之允)은 전라남도 영광으로 보냈다.
영광에 도착한 이자겸에게는 광활한 평야와 바다가 무릉도원으로 보였다. 당연히 어촌의 지붕위에 말리는 조기도 만나게 된다. 처음 먹어보는 조기의 맛이 비길 데 없는 일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임금에게 진상할 생각을 한다. 감면 부탁의 아부로 보일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아부행위가 아닌 백성의 도리로서 하는 것이라며,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굴비(屈非)라 이름 붙여 임금께 진상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임금께 진상되는 생선으로 유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원, 명, 청에도 보내졌다고 한다. 그만큼 맛있는 음식이요, 그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겠으나 중국에 보냈다는 것은 조공 아니던가.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에 반한다.
한 번에 먹기 아까워 굴비를 천정에 매달고 밥 먹게 했다는 자린고비이야기도 유명하다. 밥 한 수저에 반찬으로 천정에 매달린 굴비를 한번 쳐다보라는 것이다. 한 숟갈 먹고 두 번 쳐다보자 너무 짜겠다고 탓한다는 이야기다. 자린은 기름에 절인 종이이고 고비(考?)는 돌아가신 부모를 이른다. 여기서는 지방(紙榜)으로 쓰였다. 자린고비는 제사 지낼 때 마다 지방 쓰는 종이가 아까워, 지방 쓴 종이를 기름에 절여두었다가 매번 재사용하였다는 의미다. 엄청난 구두쇠를 이르는 말이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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