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준 원장 |
# 에피소드 1, 일용직, 항염제
대개 환자분이 들어오기 전에 전자 차트를 훑어보고, 검사결과, 영상자료 등을 간단하게 리뷰한다. 26세 남자 환자였는데 거의 6개월째 매일 항염제를 두 알씩 복용하고 있었다. 사실 항염제는 위장벽을 손상하고, 장기간 복용할 경우 신장 기능을 떨어트리기도 한다. 그래서 왜 이렇게 장기간 복용하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6개월 전에 허리디스크가 터졌는데, 수술할 정도는 아니래요. 일용직을 하는데 약을 먹지 않으면 통증이 심해서 매일 오전에 한 개, 오후에 한 개 복용해요." "결국 쉬지 않으면 허리 통증이 좋아지지 않을 텐데요?" "그래도 일하지 않으며 생계유지가 안 돼서 어쩔 수 없어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고, 마우스를 클릭하여 처방전을 발급하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그 청년의 등을 한참 쳐다보았다.
#에피소드 2: 상실, 수면제
최근 3개월 전부터 졸피뎀이라는 수면제를 복용하는 82세 어른신이 오늘도 정확하게 28일 만에 방문하셨다. 졸피뎀은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중독성과 부작용으로 인해서 28일 이상 처방이 되지 않는다. 만약 처방하려고 하면 컴퓨터 화면에 사용불가라는 경고가 깜빡거린다. 28일 맞추어서 오셨다는 건 매일 꼬박꼬박 약을 드셨다는 이야기다.
"약 안 드시면 잠을 못 주무시죠? 사실 이거 계속 장기 복용하시면 안 좋은데…." "그렇긴 하지. 그런데 내가 3개월 전 남편 먼저 보내고, 잠이 안 와. 이거 없으면 밤을 꼬박 새워."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고, 까만 마우스를 클릭하여 처방전을 발급하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을 한참 쳐다보았다.
#에피소드 3, 스테로이드 연고, 습진
필자가 일하고 있는 병원이 전문피부과는 아니지만 간단한 경우 처방을 하고, 치료 효과가 없으면 전문피부과에 의뢰하곤 한다. 1년 넘게 한 가지 연고만 처방 받는 분에게 질문을 드렸다.
"환자분, 이러시지 말고, 피부과 전문의 선생님 한 번 찾아가세요." "이미 갔어요. 갔더니 손에 물이 닿지 않아야 한대요. 그런데 제가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데 그게 가능해요? 혼자 애 키우는데 일을 안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연고 바르면 좀 나아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고, 닳아서 반들거리는 까만 마우스를 클릭하여 처방전을 발급하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중년 여성의 움츠린 어깨를 한참 쳐다보았다.
동네의원에는 아프고, 약주고, 치료하는 그 이상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대화를 더 이상 이어 나가기 힘든 순간들도 있다. 의사에겐, 특히 동네의원 의사에겐, 질병을 진단하고, 검사하고 치료하는 능력 이외에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대신해 줄 수 없고, 특별한 해결책을 줄 수도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동네의원에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답할 수 없는 순간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김화준 원장/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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