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 내외의 묘소가 있는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는 선생의 동상과 말씀비뿐 아니라 일대기와 업적 등이 적힌 패널이 곳곳에 놓여있다.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는 '애기애타'(愛己愛他·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라) 등 도산의 상징적 문구를 기록한 패널들을 곳곳에 전시했다. 제79회 광복절 경축행사로 '장난감으로 만나는 독립운동가' 등을 열어 시민에게 친숙하게 다가서는 데도 적극 나서고 있는 김재실(80)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장은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재학 시절부터 흥사단에 가입해 60년 이상 평생을 도산 정신을 실천하고 알리는데 몸 바쳐온 주인공이다. 이에 김재실 회장을 9월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45길 20에 위치한 도산안창호기념관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제가 회장을 맡고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는 3월10일 오전 11시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관에서 흥사단 관계자들과 도산 안창호 잠수함 승조원 등 약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86주기 추모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추모식은 국가보훈부와 서울특별시 강남구가 후원했는데요. 행사 진행은 전 KBS 아나운서 실장이었던 유애리 도산기념사업회 이사가 맡았습니다. 식순에 따라 참석자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제창하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했습니다. 행사 진행 내내 도산 안창호 윈드오케스트라의 협주곡으로 추모 분위기를 고양했지요.
저는 추모사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육십 평생을 위기에 처한 나라와 겨레의 안녕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살았음을 밝히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우리 민족을 일깨우는 데 현신하신 도산 안창호 선생을 그리워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어서 도산 영전에 바치는 추모사는 강정애 국가 보훈부 장관(서울 지청장 대독)과 조성명 서울 강남구청장, 조성두 흥사단 이사장이 했습니다.
이날 추모객 일동은 기립한 가운데 도산 안창호 윈드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추모 노래를 제창했습니다. 이 추모곡은 도산 선생의 수제자이신 주요한 작사, 김대현 작곡으로 '동해 물이 푸르른 채 어이 두고 가셨나요, 백두산은 솟았는데 어이 아니 계신가요. 가을 하늘 공활한 제 임의 생각 간절하고 일편단심 나라 사랑 귀에 쟁쟁 하옵네다. 남산 위의 저 송백도 임을 그려 눈물지리 밝고 맑은 저 달빛도 임 무덤에 비춰오리'라는 절절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추모 노래 합창을 끝내고, 추모객 전원은 단상의 도산 영전에 헌화하는 것을 끝으로 추모 행사를 마쳤습니다.
김재실 도산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서울 강남구 도산 안창호기념관 전시실 내 안창호(가운데) 선생 사진 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 선생 옆은 독립운동가 김구(맨 왼쪽)와 이탁 선생이다. |
-김 회장님, 대학 시절 흥사단에 가입하시게 된 계기도 궁금하고, 도산 안창호 선생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으시게 됐는지요. 참배나무의 교훈이 있으시다던데 소개해주실까요?
▲저는 KDB산업은행(산은) 전신인 한국산업은행을 거쳐 산은캐피탈, 성신양회 사장·부회장 등을 거친 금융인이자 기업인입니다.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저는 산은 재직 중 숭실대와 성균관대 등에서 10여 년 간 경제와 수학 등을 강의한 교육인이기도 합니다. 퇴직 후엔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상임고문을 지내며 언론계에도 몸담았죠.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엔 어떻게 합류했을까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도산에 미쳐 살았습니다. 졸업 후 산업은행에 취직한 뒤에도 퇴근 후와 주말을 이용해 흥사단 일을 했습니다. 결혼식도 태극기가 걸린 흥사단 강당에서 올렸습니다. '무실 역행(務實 力行)'으로 대변되는 도산의 진실성과 성실함은 제 인생의 이정표였습니다. 일단 도산 선생은 후손이 미국에 있고 고향도 평안도라 지연을 찾기 어렵습니다. 후손이나 동향 사람 중심으로 구성된 일반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제 경우는
저는 대학 1학년이던 1963년 흥사단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열린 '도산 선생 25주기 추모식'에 우연히 참석한 게 계기가 됐습니다. 행사장엔 도산의 말씀이 플래카드에 적혀 있었는데 이 중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란 글귀였습니다.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독립국의 열매가 있고, 노예 될 만한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망국의 열매가 있다"는 말을 전하려 도산이 앞서 비유로 든 문장입니다. 저는 "내가 참배나무면 참배를 결실하고 돌배나무처럼 살면 돌배를 맺는다”는 이 문장이 진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내 도산안창호선생 기념관 입구. 도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당시 흥사단 건물이 을지로 산은 본부 맞은편에 있어 입사 이후에도 흥사단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매일 퇴근 후 고등학생들에게 강연했습니다. 그리고 흥사단 시민 공개 교양 강연인 '금요개척자강좌'를 열었고, 주말 집회엔 안병욱 교수님을 비롯해 '철학 삼총사'로 불린 김태길 서울대 교수님과 김형석 연세대 교수님, 함석헌 선생 등 인기 강사 초빙에 힘썼습니다. 평양에서 직접 도산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은 김형석 교수님은 지금도 기념사업회와 협력해 인문학 강연을 제공해주고 계십니다. 장리욱 박사, 백낙준 선생 등 도산 선생과 생전 함께한 분들을 흥사단에서 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도산 선생의 어록을 즐겨 읽다 보니 이젠 거의 다 외울 정도이지요.
▲흥사단 활동과 함께 서빙고역 인근 천막에서 야학 봉사를 하다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됐습니다. 교회의 도움을 받는 야학인지라 저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국어·수학 등 교과목과 함께 성경 내용을 요약해 가르치는 시간도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를 숙고하다 신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저는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는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려면 참 진리와 정의,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교파와 개교회를 넘어 국가와 민족을 품는 신앙을 강조한 도산처럼 폭이 넓은 신앙을 추구하는 기독교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춘원 이광수가 한민족의 2대 인물로 숭배한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도산 안창호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민족의 스승’으로 불리는 도산의 진실 정신과 통합의 리더십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절실한 덕목으로 다가옵니다. 도산 선생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요, 정치지도자이면서 교육가요, 독립운동가입니다. 선생의 진실과 통합 정신은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줍니다.
▲도산 선생은 1878년 11월 평안도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했고, 언더우드 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는데요. 국민을 계몽하는 웅변으로 명성을 떨쳤고, 민족지도자들을 지원하는 데 적극 나섰습니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해 재미동포의 단결과 교민 계몽 운동을 전개한 도산 선생은 나라를 빼앗길 위기가 닥치자 귀국한 뒤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태극서관을 설립해 국민 교육과 조직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한일합방이 되자 미국으로 망명,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해 민족운동에 매진할 인재를 모으고 양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5월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해 독립운동 방략 수립에 매진했습니다. 또 미국과 상해를 오가며 대독립당 결성 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 정신입니다. 참 되자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것도 이완용이 아니라 거짓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또 지방색과 공리공론으로 분열됐던 우리 민족과 사회를 어떻게든 통합하려고 애쓰신 통합의 리더십 주인공이십니다.
우리 사회가 어지럽고 혼란스런 이유는 거짓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니 도산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크게 질책했을 게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도산 선생의 통합의 리더십을 배워야 합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급진론과 점진론을 통합하려 한 게 대표적인 사례인데요. 도산 선생이 임시정부 내무총장 자리에서 노동국 총판(차관급)으로 내려온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흥사단을 조직할 때는 단장이나 대표를 하지 않고 8도 대표로 창립했습니다. 전국을 통합하려 한 의지였는데요.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
▲도산 선생의 묘소가 서울 망우리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1973년에 도산공원으로 이장한 게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1998년 도산기념관 건립에 참여한 것도 보람된 일로 기억에 남습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해마다 3월 10일 추모식을 거행합니다. 기념관에는 도산의 유품과 서신·사진 같은 기록물, 연구서적을 전시 중입니다. 연중무휴 개관하는 데 하루 200명 정도 찾아오십니다. 저희는 도산학회를 조직해 도산 사상에 대한 논문집을 내고 있고, 연설문이나 서신 등을 발간해왔습니다. ‘도산과 사진, 그리고 역사’ 특별전을 상시 운영하면서 ‘도산과 민족 수난기 지도자들’ 특별전도 열었지요.
▲도산 정신을 2세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취지입니다. ‘애기애타’(愛己愛他·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라) 인성 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매년 2000명이 넘게 참여합니다. 글짓기 공모를 매년 실시해 도산 선생 탄신일(11월 9일)에 시상식을 합니다.
미국은 도산 선생이 교포 계몽사업과 독립운동을 하신 곳이어서 연관이 많습니다. 지난 7월에 ‘미주 한인사회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도산 안창호’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럼요.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이지요. 도산 선생은 임정 요인이신 이동녕 선생(천안 목천)이나 조병옥 박사(천안 병천)와 인연이 깊었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예산)의 폭탄투척 의거 뒤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고, 국내로 압송돼 대전형무소에서 2년 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도산 선생의 유품이 전시돼 있는데요. 흥사단 대전지부 회원은 600명이 넘습니다. 기념사업회에도 많은 분들이 참여 중이지요.
▲2016년 3월 10일 도산 선생 서거 78주년이 되는 날부터 시작했습니다.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에게 도산의 말씀 중 한 구절씩 선정해 매주 목요일에 전자우편으로 보냅니다. SNS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일이죠. 도산은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나라가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약 2만 명에게 띄우고 있는 데 받아보고 싶은 분들은 언제라도 연락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기회가 되는 대로 모아서 소책자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도산 안창호 기념관을 신축한 뒤 서울 강남구청에 기부채납해 기본 관리비를 받고 있고, 국가보훈처의 보조와 임원들의 회비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뜻 있는 분들이 함께 참여해 도산 선생의 정신을 청소년들에게 알려 애국심을 길러 주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합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고, 길이 있으면 앞으로 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명감을 갖고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충청은 충절의 고장으로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입니다. 국난에 처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바친 선열들의 고향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유관순 열사, 김좌진 장군, 김시민 장군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이 충청 출신입니다. 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끝까지 이어갔으면 합니다.
▲저는 충청인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럽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지 않나요? 누구는 느리다고 하지만 경거망동하지 않고 신중한 장점이 있지요. 한번 마음 먹으면 변치 않는 그 충절을 우리 스스로 닦고 지켜나갔으면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널리 알리는 것이 제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요. 저는 젊은 시절을 오롯이 도산에게 바쳤고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6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도산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온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많은 지역민들께서 기념사업회 일에 동참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언론사 입사가 꿈이었지만 제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 여섯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활인으로서 충실한 선택을 하기 위해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했고, 2000년부터는 산은캐피탈 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산은캐피탈 CEO가 된 뒤 180여 명의 직원들을 책임져야 했고, 고민이 매우 컸습니다. 그 와중에도 도산 선생의 정신을 경영에 도입하고자 노력했고 굉장히 열심히 일했습니다. 산은을 나온 뒤엔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상임고문과 대통령 자문 동북아경제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며 잠시 동안 공직에서의 모험을 하고, 다시 기업계로 돌아왔습니다. 대아건설 감사와 경남기업 관리총괄 사장, 성신양회 대표이사 부회장, 태강코퍼레이션 고문을 거쳐 동양시멘트(삼표시멘트) 상임감사로 활동했지요. 다양한 조직의 요직을 거쳐왔는데요. 도산이라는 롤모델을 늘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숭실대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경제통계학', '경제수학', '경영정책' 등을 강의하고 대학 재학 중 도시 빈민 미취학 아동을 위해 용산 서빙고에 청영고등공민학교(야학)를 설립해 운영했습니다. 흥사단 이외에 '나라발전연구회' 총무를 맡는 등 ‘교육’이라는 도산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제 자신의 삶에 심기 위해 노력해 온 삶이었네요.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입니다. 그는 나라가 망한 것도 이완용 때문이 아니라 거짓 때문이라고 하실 정도였죠.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도산 선생이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것은 그가 인격 훈련을 중시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도산 선생은 항상 교육을 강조했고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도산 선생은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힘이란 신용의 힘, 지식의 힘, 금전 자본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통한 관계를 중요시했고, 한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갖게끔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돈을 벌어서 저축하여 돈의 힘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죠. 도산 선생은 통합과 애국을 강조하셨고 반대편 의견을 잘 들어주시고 수용하셨습니다. 적을 안 만드셨죠.
-회장님이 건강하게 사시는 비결을 말씀해주실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도 들려주시지요.
▲멈추지 않고 살아야 멋지게 나이 든다는 소신을 갖고 삽니다. 생각으로 하든 몸으로 하든, 쉬지 말아야 멋지게 나이 드는 겁니다.
멋지게 나이 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입니다.
점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질 수밖에 없는 시니어에게 커뮤니티는 삶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을 대하려면 관심을 가져줘야 됩니다.
저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하게 도산 사상 전파 운동을 할 것입니다.
도산이 말년에 평양에서 손수 지어 은거한 송태산장을 재현하는 게 꿈입니다. 우리 지역 중도일보에서 찾아주시고 인터뷰를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담, 정리 한성일 편집위원(국장) hansung007@
▲1945년 충남 천안(동면 광덕리) 출생. 병천중학교를 거쳐 서울로 유학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서울대 경영대학원 석사 후 서울대 최고경영전략과정(ASP)을 1기로 수료했다. 고려대 정책대학원 부동산금융과정과 중앙일보 최고경영자과정(J포럼)을 마쳤다.
젊을때 신문기자가 꿈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동생 여섯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기 때문에 군 입대 뒤에도 월급을 주는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했다. 조사부 과장과 종합기획부 차장, 국제금융부장, 총재비서실장, 자금부장, 부총재보(이사) 같은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산은 최초의 해외지점인 도쿄지점 개설 주역이기도 하다. 한·중 수교 훨씬 이전인 1970년대부터 중국의 경제 체제 및 무역 관계를 연구해온 국제통으로 유명하다.
2000년부터 산은캐피탈 사장으로 4년간 활약했고,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상임고문과 대통령 자문 동북아경제추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대아건설 감사와 경남기업 관리총괄 사장, 성신양회 대표이사 사장·부회장, 대우증권그린코리아기업인수목적회사(SPAC) 회장, 태강코퍼레이션 고문,동양시멘트(삼표시멘트) 상임감사로 활동했다.점촌학원, 거제백병원, 용복어린이재단 이사와 흥사단 아카데미 총동문회장, 공의회장, 강남구 충청향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산은 재직 시 경제개발관련 통계 자료 수집·분석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정부의 외자 도입 정책에도 참여했다. 특히 중소기업본부장으로 재임하며 중소기업 및 벤처산업 육성과 외환위기에 따른 기업의 구조조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능력을 발휘했다.
본연의 업무 이외에도 대학 강의와 사회 봉사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숭실대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경제통계학’, ‘경제수학’, ‘경영정책’ 등을 강의했다. 대학 재학 중 도시 빈민 미취학 아동을 위해 용산 서빙고에 청영고등공민학교(야학)를 설립·운영했고, 흥사단 이외에 ‘나라발전연구회’ 총무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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