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 칼럼] 게임을 한다 고로 존재한다

  • 오피니언
  • 문화人 칼럼

[문화人 칼럼] 게임을 한다 고로 존재한다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 창작학과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24-09-04 16:59
  • 신문게재 2024-09-05 19면
  • 김지윤 기자김지윤 기자
2024071101000907300033931
김홍진 교수.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것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자식과 골프라는 말이 있다. 방학 내내 집에 와 머문 우리 집 아이는 좀체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이놈은 마치 가축이라도 되려는 듯 한사코 집에 머물기만을 고집했다. 잠잘 때만 빼고 거의 대부분 시간을 스마트폰과 컴퓨터와 아이패드를 끼고 유튜브나 영화를 보거나, 중세의 신화와 SF 판타지 속에서 게임만 하다가 드디어 갔다. 속이 후련하다. 이놈은 정말이지 제 영혼을 게임이란 악령에 팔아먹은 게 분명했다.

여름내 이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영상매체의 위력을 다시금 실감했다. 월터 옹과 같은 매체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디어는 인간의 의식과 감성과 삶의 구체를 재구조화한다. 가령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청소년들의 본드 흡입 사건이 종종 뉴스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 환각과 도취를 매개하는 엑스터시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게임이나 영상물이 그 기능을 대체한 것이다.

게임이나 영상물에 도취한 아이를 보며, 이것들은 이제 숭고의 대상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현대사회는 한 사람의 영웅적 행위로 바꾸기에 부조리나 모순이 너무 복잡 거대해졌다. 여기서 발생하는 무력감의 해소, 혹은 신화의 결핍을 대리하는 보정물의 필요 때문일 것이다. 이 심리적 보정 작용이 중세의 환상 속 게임으로 아이를 이끌지는 않았을까. 미증유의 멀티미디어가 실현하는 영상혁명의 시대에 게임이나 영화 등 가상 세계의 폭증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게임을 한다(영상을 본다) 고로 존재한다.

전자매체 기술이 매혹하는 고강도의 선명한 화질,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 파시스트적 속도, 즉물적이며 현란한 감각의 직접성을 자랑하는 영상매체들은 빌렘 플루서가 말하는 '마술적 기술'의 첨단을 구현한다. 이게 일상을 지배하는 문화 현실이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영화나 영상이 판타지로 치우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으나, 이제 우리는 가상이 실재보다 더 리얼한 세계를 사는 것이다.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를 보라. 이 영화에서 감독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오마주한다.



근대의 기획은 자연과학적 명증성을 지니지 않는 것, 신비로운 자연, 저승세계, 영혼의 교감, 꿈과 현실의 교직을 배제 억압했다. 게임 속 판타지는 억압된 욕망이 성취되는 장소이자 양식이다. 이를테면 이성을 앞세운 근대의 기획이 억압 배제해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장소가 판타지이다. 문명화 과정은 곧 배제와 억압의 과정이기도 하다. 환상은 이 문명화 과정에서 배제 은폐한 것들과 관계한다. 이를테면 이성적 인식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합리적 현실에서 억압되거나 추방된 것들과 관련한다.

꿈과 환상은 이성의 제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인간은 꿈과 영혼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존재의 집이 황폐해졌다. 그러나 추방당한 것들은 은폐되었을 뿐, 어둡고 축축한 무의식 깊은 심연에서 서식하며, 우리를 자꾸 유혹한다. 이성 독재의 억압된 본능은 획일화된 현실원칙의 틀에서 판타지 세계로의 일탈과 탈주를 꿈꾼다. 방학 내내 온종일 게임과 영상에 몰입한 아이에게서 나 같은 꼰대가 좋든 싫든 게임이나 판타지는 21세기 패러다임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한낮의 폭염과 열대야보다 더 끓어오르는 마음을 이렇게라도 이해하며 건너온 지옥의 한 철이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신탄진동 고깃집에서 화재… 인명피해 없어(영상포함)
  2. 대전 재개발조합서 뇌물혐의 조합장과 시공사 임원 구속
  3. [사설] '폭행 사건' 계기 교정시설 전반 살펴야
  4. 금산 무예인들, '2024 인삼의 날' 태권도와 함께 세계로!
  5. 학하초 확장이전 설계마치고 착공 왜 못하나… 대전시-교육청-시행자 간 이견
  1. 화제의 대전 한국사 만점 택시… "역경에 굴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2.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3. 대전용산초 교사 사망사건 가해 학부모 검찰 기소… 유족 "죄 물을 수 있어 다행"
  4. [국감자료] 교원·교육직 공무원 성비위 징계 잇달아… 충남교육청 징계건수 전국 3위
  5. [사설] CCU 사업, 보령·서산이 견인할 수 있다

헤드라인 뉴스


임용 1년내 그만둔 교원, 충청권 5년간 108명… 초등학교 최다

임용 1년내 그만둔 교원, 충청권 5년간 108명… 초등학교 최다

임용 1년 만에 스스로 교편을 내려놓은 충청권 교사가 5년간 108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남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신규 교원이 학교를 떠나기도 했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문정복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중도퇴직 교원 현황에 따르면 임용 후 1년 내 퇴직한 인원은 5년간 433명이다. 학교급별로는 초등학교서 가장 많은 교사가 떠났다. 2020년부터 2024년 8월까지 전국에서 179명이 퇴직했다. 중학교는 128명, 고등학교는 126명이다. 코로나19를 겪던 2020년과 2021년엔 각각 71명과 90..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의 한 사립대학 총장이 여교수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경찰이 수사에 나선 가운데, 대학노조가 총장과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대학 측은 성추행은 사실무근이라며 피해 교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A 대학 지회는 24일 학내에서 대학 총장 B 씨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여교수 C 씨도 함께 현장에 나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C 씨는 노조원의 말을 빌려 당시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C 씨와 노조에 따르면, 비정년 트랙 신임 여교수인 C 씨는..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20대 신규 대원들 환영합니다." 23일 오후 5시 대전병무청 2층. 전국 최초 20대 위주의 자율방범대가 출범하는 위촉식 현장을 찾았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신입 대원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첫인사를 건넸다. 첫 순찰을 앞둔 신입 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맞은 편에는 오랜만에 젊은 대원을 맞이해 조금은 어색해하는 듯한 문화1동 자율방범대원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위촉식 축사를 통해 "주민 참여 치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자율방범대는 시민들이 안전을 체감하도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장애인 구직 행렬 장애인 구직 행렬

  •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