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 한남대 명예교수· |
신탁(神託)이란 고대 그리스 땅 델피라는 성도(聖都)의 파르나소스 산 밑 아폴론 신전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예언이었다. 당시 그곳은 세계의 배꼽 즉 세계 중심이었다. 신전 근처에 널찍한 바위에 세 발 의자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 무당인 피티아가 앉아 아폴론의 말씀을 들으러 온 고객에게 신의 말씀을 대언했다. 이 대언이 바로 신탁이었다. 이 신탁은 일상어가 아니라, 바위 틈새로 새어 나온 가스에 취해서 뱉는 미친말(狂言)이었다. 그럼 광언을 다시 신전 사제가 해석해서 일상어로 전해주었다. 3단계 과정 거친 이 신탁의 일관성, 정확성, 신뢰성은?
당시 강국 테벤의 왕 라이오스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자 델피를 찾아가 신탁을 받았다. 무서운 내용이었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인데, 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것. 저주였다. 시간이 지나 정말 아내 이오카스테가 아들을 낳자, 그 부부는 '이상 맞게' 그 저주가 두려워 갓난이 두 발을 꿰매어 하인에게 산중에 버리라 지시했다, 하인은 아이가 불쌍해서 지시를 어기고, 산중에서 만난 이웃 나라 코린토의 목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이 아이 오이디푸스가 그 후 성장해서 신탁내용을 실현했고, 그 사실을 안 그는 자신 눈을 찔러 맹인이 되었다.
이 전설을 극화하고 연출한 소포클레스는 운명의 위력, 당대 지도자의 맹목(盲目)과 그 폐해를 관객들에게 환기시키려 했다. 사실 테벤의 국가적 재난, 매일같이 성문 앞에서 수수께끼를 내어 답을 못 대면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여성 괴물 스핑크스를 일거에 척결할 정도의 용맹과 지혜를 갖춘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만만하여 그의 맹목을 지적하는 맹인 지혜자 테이레시아스를 무시했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맹목을 인정하고 스스로 눈을 찔러 맹인이 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왕의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했냐는 점이다. 이 서사에서 신탁의 신뢰성에 대한 질문은 처음부터 생략되어 있다. 사람들이 그 신탁을 믿어야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델피를 찾는 고객의 무조건적인 믿음 즉 맹신만이 신탁의 효용성을 보장했을 것이다. 만약 라이오스나 이오카스테가 조금만 의문을 품었다면 자식을 유기하는 치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태는 쉽게 방지될 수 있는 일이었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그런 무지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그저 운명이니까? 명징한 의문과 질문은 맹목의 신탁을 파괴한다.
최근 독일의 극작가 심멜페니히의 연극 < 인류의도시·오이디푸스>는 이 주제를 매우 해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연극 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 "신탁 들으러 여기 오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관점에서 패망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은 달리할 의지가 없으며, 달리 할 수도 없다. ... 신탁의 집에 들어온 사람은 결코 그 집을 떠날 수 없다. 그때부터 그는 영원히 여기에서 살 것이다. 신탁의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눈빛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맹목은 암흑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이다.
지도자의 맹목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준다. 임박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향해 상대진영 인사가 '그 사람 이상해'라고 말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날 갑자기 의대정원 이천 명 증원을 선포한 뒤 그 뒤의 큰 혼란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이나, 조국 독립투쟁 역사를 제대로 인정치 않으려는 이를 하필 광복절 즈음에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임명하는 일 등은 참 이상하다. 우리의 지도자가 '이상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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