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 칼럼] 맹목(盲目)의 언어

  • 오피니언
  • 문화人 칼럼

[문화人 칼럼] 맹목(盲目)의 언어

송전 한남대 명예교수

  • 승인 2024-08-28 17:05
  • 신문게재 2024-08-29 19면
  • 김지윤 기자김지윤 기자
2024070401000374800012641
송전 한남대 명예교수·
고대 그리스 희곡에 많은 원초적인 사건이 묘사되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충격적이고 또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큰 반향을 일으키는 사건이 오이디푸스 사건일 것이다.

신탁(神託)이란 고대 그리스 땅 델피라는 성도(聖都)의 파르나소스 산 밑 아폴론 신전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예언이었다. 당시 그곳은 세계의 배꼽 즉 세계 중심이었다. 신전 근처에 널찍한 바위에 세 발 의자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 무당인 피티아가 앉아 아폴론의 말씀을 들으러 온 고객에게 신의 말씀을 대언했다. 이 대언이 바로 신탁이었다. 이 신탁은 일상어가 아니라, 바위 틈새로 새어 나온 가스에 취해서 뱉는 미친말(狂言)이었다. 그럼 광언을 다시 신전 사제가 해석해서 일상어로 전해주었다. 3단계 과정 거친 이 신탁의 일관성, 정확성, 신뢰성은?

당시 강국 테벤의 왕 라이오스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자 델피를 찾아가 신탁을 받았다. 무서운 내용이었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인데, 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것. 저주였다. 시간이 지나 정말 아내 이오카스테가 아들을 낳자, 그 부부는 '이상 맞게' 그 저주가 두려워 갓난이 두 발을 꿰매어 하인에게 산중에 버리라 지시했다, 하인은 아이가 불쌍해서 지시를 어기고, 산중에서 만난 이웃 나라 코린토의 목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이 아이 오이디푸스가 그 후 성장해서 신탁내용을 실현했고, 그 사실을 안 그는 자신 눈을 찔러 맹인이 되었다.

이 전설을 극화하고 연출한 소포클레스는 운명의 위력, 당대 지도자의 맹목(盲目)과 그 폐해를 관객들에게 환기시키려 했다. 사실 테벤의 국가적 재난, 매일같이 성문 앞에서 수수께끼를 내어 답을 못 대면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여성 괴물 스핑크스를 일거에 척결할 정도의 용맹과 지혜를 갖춘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만만하여 그의 맹목을 지적하는 맹인 지혜자 테이레시아스를 무시했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맹목을 인정하고 스스로 눈을 찔러 맹인이 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왕의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했냐는 점이다. 이 서사에서 신탁의 신뢰성에 대한 질문은 처음부터 생략되어 있다. 사람들이 그 신탁을 믿어야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델피를 찾는 고객의 무조건적인 믿음 즉 맹신만이 신탁의 효용성을 보장했을 것이다. 만약 라이오스나 이오카스테가 조금만 의문을 품었다면 자식을 유기하는 치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태는 쉽게 방지될 수 있는 일이었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그런 무지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그저 운명이니까? 명징한 의문과 질문은 맹목의 신탁을 파괴한다.

최근 독일의 극작가 심멜페니히의 연극 < 인류의도시·오이디푸스>는 이 주제를 매우 해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연극 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 "신탁 들으러 여기 오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관점에서 패망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은 달리할 의지가 없으며, 달리 할 수도 없다. ... 신탁의 집에 들어온 사람은 결코 그 집을 떠날 수 없다. 그때부터 그는 영원히 여기에서 살 것이다. 신탁의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눈빛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맹목은 암흑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이다.

지도자의 맹목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준다. 임박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향해 상대진영 인사가 '그 사람 이상해'라고 말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날 갑자기 의대정원 이천 명 증원을 선포한 뒤 그 뒤의 큰 혼란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이나, 조국 독립투쟁 역사를 제대로 인정치 않으려는 이를 하필 광복절 즈음에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임명하는 일 등은 참 이상하다. 우리의 지도자가 '이상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물어야 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고교 당일 급식파업에 학생 단축수업 '파장'
  2. 대전 오월드서 에어컨 실외기 설치 작업자 추락해 사망
  3. 열악했던 대전 여성노숙인 쉼터…지원 손길로 '확 달라졌다'
  4. "뿌리부터 첨단산업까지… 지역과 함께 혁신·성장하는 대학"
  5. 대전 중구 교육부 평생학습도시 신규 선정 '중구가 대학, 온마을이 캠퍼스'
  1. 대전교사들 "학교 CCTV 의무화, 사건 예방에 도움 안돼" 의무화 입법에 반발
  2. 계룡산성 道지정문화재 등록 5년째 '보류'…성벽과 기와 무너지고 흩어져
  3. 대전 금고동 주민들 "매립장·하수처리 공사장 먼지에 농사 망칠판" 호소
  4.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5.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헤드라인 뉴스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탄핵정국 속 두 쪽으로 갈라진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4·2 재보궐선거 본 투표 당일인 2일 시의원을 뽑는 대전 유성구 주민에게선 사뭇 비장함이 느껴졌다.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 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발현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저마다 투표소로 향한 것이다. 오전 10시에 방문한 유성구제2선거구의 온천2동 제6투표소 대전어은중학교는 다소 한산한 풍경이었다. 투표 시작 후 4시간이 흘렀지만 누적 투표수는 고작 200표 남짓에 불과했다. 낮은 투표율을 짐..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국내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이 약 9500여 만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40대 차주의 평균 대출 잔액은 1억 1073만 원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은 9553만 원으로 조사됐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지난 2012년 이후 역대 최고 수준이다. 1인당 대출 잔액은 지난 2023년 2분기 말(9332만 원) 이후 6분기 연속 증가했다. 1년 전인 2..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숨겨진 명곡이 재조명 받는다. 1990년대 옷 스타일도 다시금 유행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역주행'이라 한다. 단순히 음악과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권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려 재차 살아난다. 신규 분양이 되며 세대 수 상승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옛 정취와 향수가 소비자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원도심과 신도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다시금 상권이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는 역주행 상권이 지역에서 다시금 뜨고 있다. 여러 업종이 새롭게 생기고, 뒤섞여 소비자를 불러 모으며 재차 발전한다. 이미 유명한 상권은 자영업자에게 비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 한산한 투표소 한산한 투표소

  •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