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약속 시간 때문에 뛰다시피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급히 개찰구를 통과하려는데 앞에 웬 덩치 큰 개가 서 있었다. 나는 교통카드를 찍으려다 말고 멈춰 섰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덩치는 커도 순해 보였다. 더욱이?몸 부분을 X자로 묶은 걸 보니 주인이 예의 있는 분 같았다. 주인인 듯한 분은 옆 개찰구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있었다.
문득 며칠 전 생각이 났다. 아파트 부근을 걸어가는 데 개가 내 옆을 지나는 듯싶더니 갑자기 뒤돌아서서 으르릉대면서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순간 오금이 저렸다. 내가 잔뜩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자, 개 주인은 오히려 나를 책망했다. 얘들이 영리해서 자신을 경계하는 걸 알아서 그렇다며 자기 개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날 본 덩치 큰 개는 짖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튼 나는 건너편 개찰구 앞에 있는 개와 개 주인이 먼저 통과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주인은 교통카드를 개표기 위에다 찍었다가, 다시 아래에 찍기를 반복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한마디 했다. "교통카드라고 표시된 곳에 카드를 대셔야 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몇 번인가를 잘못 찍고 나서야 제대로 찍었다. 후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개와 주인은 무표정하게 개찰구를 통과하는데, 얼핏 보니 개에 '안내견' 표찰이 붙어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저분은 앞이 안 보이시는구나. 그래서 교통카드 찍는 곳을 못 찾으셨던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재촉했던 내 자신이 야속하기만 했다.
나는 용서를 구하듯 말했다. "앞이 안 보이시는군요."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말없이 개찰구를 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멈칫 서더니 뒤돌아서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출구는 바로 가시면 돼요." 그러나 그는 머뭇대다가 화장실을 물었다. 아, 화장실… 나는 이미 개찰구를 들어와서 다시 나갈 수는 없기에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남자 화장실은 오른쪽에 있어요." 그분은 개와 함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 역무원이 밖이 소란해선지 나오더니 나를 바라봤다. 나는 사정을 말하고 조금 후 화장실에서 나오시면 도와드리라고 말했더니 "알겠다"고하면서 문 쪽으로 갔다.
나는 지하철에 승차했다. 한 정거장이 지났을 때였다. 저쪽 칸 바닥에서 뭔가 기어 오고 있는 듯해서 다시 보니 구걸하는 거였다. 원 세상에나. 얼마 전에도 지하철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그분은 아니겠지만 똑같은 처지의 모습을 오늘도 본 것이다. 그런데 이분은 눈은 이상이 없고 몸이 불편하실 뿐인데도 왠지 무서움이 앞섰다. 정말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실까, 의심도 들었다. 한편 장애조차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내가 딱했다. 이분은 바닥에 앉은 채 엉덩이를 끌고 이동하는데 한 번씩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기라도 하면 섬뜩했다.
혹시 내가 내릴 때 이분도 같이 내리게 된다면, 생각하니 소름이 오싹했다. 앞이 안 보이는 분은 좀 더 도와드리지 못해서 마음이 짠했는데 이분은 바라만 봐도 두려움이 생기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나는 내릴 것처럼 슬며시 일어나서 자연스럽게 뒤 칸으로 이동했다. 좀 더 멀리 있기 위해 한 칸 더 갔다.
그곳에는 전동차를 탄 분이 각각 두 분이 있었다. 전동차도 좋아 보였다. 그들에게는 긍정적 에너지가 보이는 듯했다. 사실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타인한테 동정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그 자체로 자신감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 또한 생각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우연이지만 아무튼 그날은 그렇게 세 사람의 각각 다른 장애우를 만났다. 삼인행 필유아사 (三人行 必有我師)라는 말처럼 그중엔 필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가듯 잠깐이었지만 그 어떤 교훈을 준거 같았다.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내 가족에게조차도 그 어떤 부담도 주지 않도록 하는 것 말이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는 더욱 자기의 내면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여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몸과 마음이 건강만 하면 그 무엇도 다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민순혜/수필가
민순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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