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한 대전대 교수 |
주시경(周時經·1876-1914)은 한 나라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천연으로 구획된 땅과 거기에 거주하는 인종,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세 가지 요인 있었던 까닭에 우리나라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한글은 창제 이후 민족의 얼이 반영되면서 변신을 거듭했고, 이 땅 역시 이를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피가 스미고 엉긴 곳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수많은 성씨의 혼합과 탄생을 거쳐 오늘의 우리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이렇듯 적층을 통해 가이없는 계승과 발전 끝에 도도한 대하(大河)를 이루며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건국이란 우리 민족이 처음 열리던 단군조선의 시대뿐이다. 이후 우리는 반도에 터를 잡고 하나의 민족 단위로, 동일한 언어로 살아왔다. 선조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라 했고, 이성계는 단군조선을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조선이라 했다. 고려나 조선시대, 심지어 삼국시대에도 단절에 바탕을 둔 건국절이란 없었거니와 이를 기념하는 행사조차 없었다.
적층의 관점뿐 아니라 미시적 측면에서도 1948년의 건국설은 언어도단이다. 미국은 어떠한가. 미국독립기념일은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이 대륙 회의에서 승인된 날인 1776년 7월 4일로 잡고 있다. 미국 역시 국가의 근본 요소인 땅, 민족, 언어가 있었지만 영국의 지배아래 있었다. 주권이 없는 식민 상태를 벗어나고자 독립선언을 했거니와 그 회복의 과정을 독립전쟁이라 불렀다. 그들은 이를 건국 전쟁이라 하지 않았으며, 1783년 전쟁의 승리로 미합중국 정부가 공식 들어선 뒤에도 건국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개화기 전후부터 1945년까지는 주권을 상실한 상태, 곧 식민 상태였지 우리나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미국처럼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잠재되어있던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일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 낭독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독립선언이 먼저 있은 다음 한 달 뒤인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미국은 이 과정이 동시에 이뤄졌다.
주권이 없던 시절 독립운동의 상징은 태극기와 애국가이다. 상징(symbol)이란 오직 소속 집단에게만 유효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태극기와 애국가는 우리 민족이라는 귀속성을 가질 때만 구속력이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태극기를 세우거나, 애국가를 부를 수 없었다. 태극기와 애국가는 안중근과 유관순, 윤봉길의 품에, 초가집의 다락 속에 숨어 있었다. 그것이 수면 위로 당당히 올라온 때가 3·1운동이다.
이때를 계기로 태극기는 삼천리 곳곳, 만주 벌판으로까지 뻗어 나갔다. 봉오동의, 청산리의 독립군들, 애국지사들은 태극기와 더불어 일군(日軍)과 밤을 새우는 독립 전쟁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밝아오는 새벽녘, 봉오동의 언덕 위에 여전히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았을 때, 그들은 독립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음을, 꿈 서린 자유의 땅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 태극기는 미기병대의 파괴된 성채의 한 켠에서 휘날리던, 승리의 징표였던 성조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반면 독립군 잡는 조선인 간도 특설대나, 천황(天皇)의 신민(臣民)으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조선인들에게는 태극기란 보는 즉시 부러뜨려야 할 적기(敵旗)에 불과했다.
광복절은 독립운동의 결과 빼앗긴 주권이 회복된 날이고, 48년 8월 15일은 그 주권이 공식 행사되는 날일 뿐이다. 이때를 건국절로 하자는 것에는 분명 저의가 있다. 반만년의 역사와 독립투쟁을 부정하고, 태극기를 적기로 생각한 것에 대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反日種族主義)'만 말하지 말고, 반한(反韓) 종족주의에 대해서도 말할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태극기를 적기로 간주한 신종족(New race)임이 분명하며, 그럴경우 8·15 건국절은 그들 속에서만 정당성을 갖게 될 것이다. /송기한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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