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 감상으로도 충분한 피서가 되리라. 문화원에서 잠깐씩 열기 식히는 사람도 만난다. 필자 방은 냉방기를 잘 켜지 않지만, 시민공간인 로비는 냉방기가 빵빵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수다 떨거나, 책보기, 휴대전화에 열중인 사람도 있다. 여유가 있을 때는 덩달아 책을 펼친다.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 ~ 미상, 도화서 화원)의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모작에 대한 자료를 살피고, 그림을 감상한다. 그림 중 <대관령>에 눈길이 멈춘다.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다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신혼여행도 설악산으로 갔다. 이후에도 수차례 더 갔지만 모르기는 여전하다. 안다는 것은 교육이나 경험, 사고를 통하여 얻은 정보나 지식이다. 그것만으로 안다 하는 자체가 모순 아니랴.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부분적으로 아는 것 가지고 전체를 안다 거나, 겉만 보고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자성하게 된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다 보니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한 번은 아이 둘, 아내와 함께 승용차로 찾은 일이 있다. 미리 산행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갑자기 설악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 오후 늦게 출발했다. 강원도에 들어서기도 전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대관령 고개 정점 넘어, 언덕배기 공터에 주차하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여명이 밝아오며 꿈같은 풍광이 드러난다. 구불구불한 길이 산에 기대 숨바꼭질 하며,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사라진다. 인상적이었던 그 모습이 <대관령> 그림에 겹쳐진다.
지금이야 서울영양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동해안고속도로 등 교통사정이 무척 좋아졌지만, 당시엔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부분 2차선 도로였다. 조선시대 도로 사정이 훨씬 더 열악했음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이 금강산을 찾았다. 유람기, 화첩 등을 남기기도 한다.
제왕인들 금강의 명성을 어찌 모르랴. 나랏일이 워낙 바빠 찾을 시간이 없자, 누워서 라도 즐기려(臥遊) 한다. 화원을 보내 그려오게 한다. 정조 역시 1788년 단원 김홍도와 복헌 김응환(復軒 金應煥, 1742 ~ 1789, 도화서 화원)을 보내 금강산 일원을 그려오게 한다. 정확한 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전하는 화첩의 지명을 검토, 분석한 결과 한양(漢陽)→영동 9군(嶺東 9郡)→진양(淮陽)→내금강(內金剛)→외금강(外金剛)→회양(淮陽)→한양일 것이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추정한다. 4개 군보다 넓은 영동 9군, 오대산, 설악산, 해금강, 내금강, 외금강이 화첩의 중심 내용이다. 때문에 '사군첩' 보다 '김홍도필 금강산화첩(金弘道筆 金剛山畵帖)'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
여행에서 사생해온 초본에 의거 제작한 채색횡권본(彩色橫卷本)과 화첩본(畵帖本, 5권 70폭) 두 가지를 정조에게 진상한다. 채색횡권본은 화재로 소실되고, 화첩본은 행방이 묘연하다. 그럼에도 많은 임모작(臨模作) 화첩이 전하는 데, 단원이 후세에 미친 엄청난 영향력의 한 단면이다. 교본, 사표가 되었다는 의미다. 보고 있는 60폭 《금강사군첩》은 국립중앙박물관이 1995년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에' 선보인 것이다. 다행히 임모한 화가 역시 뛰어나고 정밀하게 그려, 원작의 구도와 화풍의 특징 등이 잘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비단에 수묵담채, 30.4cm × 43.7cm |
김홍도는 화원 본연의 업무에 해당하는 행사도나 어진, 사대부의 초상화제작 외에 일반인의 생활모습 그리길 좋아했다. 정조가 눈여겨보았던 것일까? 창작활동을 도우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화원 업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1778년 '금강산도' 제작하라 유람 시키며, 1784년 안기역 찰방으로 보내 약 2년 동안 근무하게 한다. 대마도에 보내 일본 지도도 제작하고, 동지사를 수행하여 중국에도 다녀온다. 용주사 불화 조성 감독도하고 정조 어진 제작도 한다. 1791년 어진 제작 공로를 내세워 연풍 현감으로 보내, 1795년까지 봉직하게 한다.
《금강사군첩》은 단원의 생애 후기, 한국적 정취가 물씬 담긴 개성적 산수화풍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개인에서 나아가 조선 후기 화단에 미친 지대한 영향으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발전의 정점을 이루게 했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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