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극단 헤르메스의 <목소리>(장콕토 작, 서경동 각색, 연출/7.19~7.21/소극장고도)를 이전년도에 이어 다시 본다. 연극은 같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단 한 번도 같은 작품이 있을 수 없다. 이 작품은 1인극인데, 그만큼 배우와 연출의 교감이 밀접할 수밖에 없다. 극중 인물은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채, '전화기' 하나로 이별의 대화와 그 수용의 감정을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만 한다. 그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에 대한 집착, 다양한 감정 곡선의 표현에서 우리는 '인간성'을 발견한다. 단지 남녀의 사랑, 이별의 감정만이 아니라, 그 본연의 '결핍'과 '불안'을 이 무대 위, 장치된 사각의 균열과 산개된 장식품들 속에 소통 부재의 이 공간에 있는 단 한 명의 인물을 통해 이를 발견코자 한 것이다. 이제 모노드라마의 상연은 과거처럼 낭만적인 흥행에 따라 장기공연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일찍 무대가 바뀐다. 배우가 온전히 긴 호흡으로 캐릭터를 체득하기 전에 아쉽게도 짧은 공연으로 퇴장하고 만다. 무대 위 그 늘어지고 꼬인 긴- 긴- 전화선의 길이만큼 상연이 거듭해진다면, 아마 그 연극은 세계 제일의 무대가 될 수 있을 텐데. 어디 연극뿐이랴, 극장을 나서자마자 이방인이 되고만 나는 교감을 위한 시간 따윈 우리에게 먼 이야기라는 것을 금세 깨닫는다.
연극 이야기를 덧붙여 본다. 극단 아라리에서 <동물농장>(엄태훈 각색, 연출/7.25~7.28/이음아트홀)을 공연했다. 잘 알려진 '조지 오웰'의 풍자우화소설을 연극으로 만든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소설보다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는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원작이 사회주의 공동체의 변질을 다루었다면, 오늘의 연극은 어떤 공동체의 오늘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우화 속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아마도 이 작품은 이 사회 또 다른 '독재'와 '부패'의 모습을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극중 문해할 수 있는 동물의 구별이나, 독재자 나폴레옹의 '개'들의 공격이라든지, 깨어있는 시민이 민주주의의 보루라든지 하는 동시대적인 감각을 이 작품에서 확인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부실한 공동체 사회, 이 <동물농장>이 얼마나 사회비판적으로 시의성 있게 접근할 만한지 다시 곱씹게 된다. 내일의 무대와 연극은 더 나아지겠지만, 우리의 세계는 과연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부실한 사회, 비판적 사회관점이 없는 맹목적 지지자의 일면이나 선정적 구호와 가짜 뉴스가 넘치는 이 사회에 다시 '동물농장'을 봐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서울 '나온시어터'에서 '팀 티티새'의 <건널목교차로>(조승혜 작.연출/7.17~7.21)를 봤다. 서울 페미니즘연극제는 6회째를 맞는데도 이제야 처음으로 극장을 찾은 것이다. 내가 편향되긴 했나보다. 새로운 가족에 대한 공감을 하면서 갇혔을 때는 돌파해야 된다는 연출의 말을 옮겨보지 않을 수 없다. "경적을 울려대는 온갖 자동차들과 신호등, 울타리, 표지판. 길 위에는 우리를 막아 세우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방해할지언정 우리는 꿋꿋이 걷습니다. 저 길 건너편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라는 건널목 교차로의 메시지는 상실과 소외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로 물들어 간다. '인간'은 그 얼마나 섬세하게 이해되고 바라봐야 할 존재인가를 새삼 알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온통 이 세계의 인간, 이 문제투성이지 않은가. 세계는 이렇게 건너가고, 연결하고 또 건너가고, 연결하고 이렇게 이어지면서 만들어진다. 녀석이 학원 마치고 나오려면 이제 15분 남았네. 15분 동안, 매미소리나 실컷, 바람소리나 실컷 들어야겠다.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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