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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향기 회장 |
수려한 문체, 감성 충만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자연에 대한 묘사, 잔잔한 감동의 줄거리로 인해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푹 빠져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최근 '크눌프'라는 헤세의 소설이 우연히 손에 잡혀서 읽게 되었다. 공부 잘하고 총명한 소년이었던 크눌프는 어느 날 프란치스카 라는 소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녀에게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고 부모님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카가 싫어하는 라틴어 학교를 그만두고 독일어 학교로 전학하여 기술자나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조숙한 프란치스카에게 크눌프는 단지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크눌프는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된다, 젊은 시절 한순간의 열정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고 안정된 삶을 꾸리지 못한 채 평생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평생을 방랑자로 살아간다고 해서 크눌프가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이 고장 저 고장을 떠돌면서도 친구들이 여전히 곳곳마다 있고, 그를 환대한다. 떠도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는 않는다. 그러나 방랑하는 생활이 세상을 오직 즐겁고 낭만적으로만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이 하나 있지만 만나지 못하고 있고,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이 살아가는 힘겨운 삶의 고난을 함께 아파한다.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이 아니고 삶에 힘들어하고 하느님께 불평하기도 하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뇌한다. 결국 폐결핵에 결려 고향으로 가는 길에 만난 의사 친구 마호트는 그를 진정으로 걱정하며 돌보아 주고 고향 마을에 요양병원을 주선해주지만, 그는 결국 산길 모퉁이에서 삶을 마감한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따뜻하게 품는 일과 세상일에 유능하고 안정된 일상을 살아가는 일을 비교하거나 병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고 일상에 짓눌리지 않으며 하루 하루가 속박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행복할 것 같지만 크눌프가 고뇌하듯이 그것이 꼭 매일 매일이 행복하고 삶의 의미가 충만한 일들로만 가득한 상태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크눌프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 하고 하느님께 긍정하는 대답을 하고 눈을 감는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며 크눌프를 생각해 본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현실의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일이기 어렵다. 감성이 자유롭게 떠다니도록 하고, 현실적인 생각에 속박되지 않으며 상상을 펼쳐 나간다는 점에서 정신의 자유로운 방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크눌프가 그렇듯이 떠돌아다니지만 자연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일이며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계속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크눌프가 석공이 된 친구 샤이플레를 만났을 때 총명하고 재능이 많았던 크눌프를 기억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네는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그것을 발휘하지 않았단 말이야… 이런 말 한다고 노하지는 말게" 크눌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자하신 하느님은 너는 왜 지방법원 판사가 되지 않았지? 하고 묻지는 않을 걸세, 아마 어린애 같은 녀석이 또 왔구나 하고 말씀하시겠지. 그리고 아이 보는 일 같은 쉬운 일을 맡겨 주실 것일세…." 크눌프와 같이 세상을 자유롭고 거리낌 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더구나 나와 같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는 크눌프 같은 허허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더 욕심을 부리면 우리의 일상생활까지 확장되어 매일의 일상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헤세는 크눌프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는 전지전능한 자세로 삶과 인간성에 대한 규범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를 사로잡는 것을 묘사할 따름입니다. 크눌프 같은 인물들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롭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유용한 인물들보다는 훨씬 덜 해롭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잡는 일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크눌프처럼 재능 있고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 그의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크눌프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헤르만 헤세, 어느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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