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홍철 국립한밭대 명예총장 |
글자 그대로 공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이지만, 달라이 라마에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사물들, 사람들, 동물들, 생각들, 감정들, 물건들에 우리가 이름 붙인 모든 것"이 공이라고 했는데, 밍규르 린포체의 공에 대한 설명은 더 어렵습니다. 그에 의하면 공은 '제로의 의미'가 아니라 '제로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공은 물건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것이 생겨나고 변하고,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도록 허용하는 일종의 관계인 것입니다. 두 분 모두 공을 상호의존성으로 파악했고 일종의 잠재 가능성이라는 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베트남 명상 스님인 틱낫한도 '공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분리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언젠가 한국을 방문한 틱낫한은 공에 대해 친절히 그리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공이란 어떤 것일까요? 공을 철학자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공의 의미만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공은 철학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공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공은 비존재가 아니며,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공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본성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불교와 기독교 등 종교의 벽을 두지 않아 열린 종교학자로 알려진 길희성 교수나 종교에 대한 비교 연구를 한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등도 '공'에 대한 불교와 기독교의 입장 차이를 설명하였습니다. 재작년에 작고하신 길희성 교수님은 '보살 예수'에서 불교는 사물의 존재를 다른 사물과 상호의존성이라는 수평적 관계에서 파악하고, 기독교는 허구성을 안고 있는 사물을 존재하게 해주는 어떤 절대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차이를 설명합니다. 오강남 교수는 여러 강론을 통해 불교는 '참 나(참된 본래 모습의 나)가 곧 절대자'라고 규정하나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는 하나님뿐'이라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와 불교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깨닫고 나면 궁극적인 실재와 하나가 되는 것이 불교의 목표인데 이에 반해 기독교는 하나님만을 절대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의지하지만 불교 신자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틱낫한 스님은 "기독교와 불교는 인류 역사에 핀 '아름다운 두 송이 꽃'이다"라면서 기독교와 불교 간의 이질감보다는 동질감에 주목합니다. 특히 '기도'라는 책에서 "기독교 신자든 불교 신자든, 비록 종교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기도하라'"고 선포하면서, 기도는 웃음과 행복을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분은 공통점을 강조하지만, 저는 기독교 신자, 불교 신자 그리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기도'의 본질적 의미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틱낫한 스님의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황지우 시인의 "개미 날개만 한 지식으로 화엄창천을 날아다니는구나"라는 시 구절을 저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네요.
염홍철 국립한밭대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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