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 길 갈 때마다 심심찮게 들었던 조롱의 말이다. 나는 키가 작아 자존심 상하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이 많이 밉고도 원망스러웠다. 남들 다 크는 키도 작게 낳아 주시어, 이런 치욕 속에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키가 작아 그 번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학 입학시험 면접 때에도 가슴 졸이는 순간이었다. 고지식했던 나는 대학 입학시험 때에도 고등학교 다닐 때 입던 교복을 그대로 입고 갔다. 그런데, 면접시험장에서 면접관 교수가 하는 말이 " 아이고, 저렇게 작은 사람이 어떻게 중·고등학생들 가르치고, 생활지도를 할 수 있겠어! "
혀를 차더니 체육과 조교를 시켜 키 재는 신장기를 찾아오라는 거였다. 체육과 조교는 고등학교 선배였는데 내가 입은 교복을 보고 후배라는 걸 알게 된 거 같다. 나중에 들으니 신장기를 찾아다 주면 후배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변명을 했다고 했다. 체육실에 가서 신장기를 찾는 척하고, 찾아 봐도 없더라고 말했다는 거였다.
합격 불합격 당락을 결정짓는 입학사정회에서도 내 이야기가 화젯거리가 됐다고 들었다. 키가 작아 불합격시키느냐, 합격시키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으로 팽팽하게 맞섰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맞은 입학시험 교과목 성적이 입시커트라인 점수보다 많이 높아서 그게 구세주 역할을 했다는 후문(後聞)도 있었다. 고교 선배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초임지 덕산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직생활 1년이 되자마자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논산 훈련소로 갔다. 훈련소를 가면 바로 군 입대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훈련소에서도 징병 신체검사를 다시 해서 기준 미달자는 되돌려 보내는 거였다. 신장이 워낙 작으니 키부터 재자는 것이었다. 잠시 후 징병검사관이 하는 말이, "남상선 입소자 신장 150㎝, 판정 불합격, 난쟁이 좆자루 만한 새끼가 집에 가서 애나 볼 것이지 여길 왜 왔어?"
이렇게 키가 작아 군 입대를 못하고, 돌아와 덕산 지서에서 방위 병으로 근무를 했다. 낮에는 출근하여 수업을 하고, 야간에는 지서 초소에 나가 격일제로 보초를 섰다. 방위 병 근무로 국방의 의무를 대신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키가 작아 청년 시절에도 고민을 많이 했다. 결혼적령기가 된 청년들은 맞선을 보러 간다, 데이트를 나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키가 작아서였는지 혼담이 들어오는 데가 없었다. 어쩌다 규수감이 있다 해도' 키 '자만 꺼내면 볼 것도 없이, 없던 일로 해 버렸다.'키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유달리 작은 키로, 난쟁이니, 난쟁이 좆자루니, 하는, 엄청난 멸시와 조롱속에 살았다. 게다가 가정 빈곤으로 집에서 돈 한 푼 갖다 쓰지 못하고,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다. 매일 같이 하루 4팀 아르바이트를 하여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4년 내내 매일같이 3∼4시간밖에 못 잤다. 코피를 쏟고 빈혈로 쓰러지면서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께서 대학 입학한 지 1달 만에 돌아가셨다.
작은 키로 오나가나 조롱당하지, 수면 부족으로 코피를 쏟고, 빈혈로 쓰러지지, 곤궁한 집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니 백방으로 생각해도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세상 살맛이 안 났다. 그래서 인생을 포기하려고 금강다리를 몇 번이나 갔다가 왔다. 그럴 때마다 내 주변엔 좋은 분들이 많이 계셨다.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이었다. 그 덕분으로 힘을 얻어 열심히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겨우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키가 작은 단점을 보완하여 인정받는 교사가 되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실력이 있어야 학생들이 얕잡아 보지 못한다고 작품을 많이 암기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하지 않는 교안 없는 수업을 하려고 애를 썼다. 대학4년 동안 밤잠 못 자는 아르바이트로 다양한 배경 지식도 쌓게 되었다. 작품을 많이 암기하고 교안 없는 수업을 한 것이 나중엔'걸어다니는 사전'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키가 작아 내 살려고 자구책을 찾아 노력한 것이 결국 인정받는 교사가 된 것이었다. 그 결과 거의 부임하는 학교마다 고3 담임이었다. 39년 교직 생활 중에 29년이 고3 담임이었다. 남상선교사는 '세 번 놀라게 하는 교사'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3번 놀란다는 말은 이렇다. 첫째는 키가 작아 놀라고, 두 번째는 실력 있는 교사라서 놀라고, 세 번째는 체구가 아무리 크고 힘센 학생이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게 해서 놀란다는 거였다.
학생을 편애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쳤다. 내가 담임한 학생은 어떤 문제학생이라도 끈질긴 집념으로, 사랑으로, 지도하여 낙오자가 없게 했다. 그렇다 보니 참교육자로 인정받아 2008년 12월에는 TJB교육대상을 받기도 했다. 승진에 신경 쓰지 않아 평교사로 퇴임을 했지만 교육자로서 누릴 만한 영광은 다 누렸다.
제자들과 학부모의 기억속에 남는 교사가 되었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는 교사로 퇴임했으니, 난쟁이가 작은 거인이 된 셈이었다. 가난과 작은 키가 나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한 때 미워하고 원망했던 부모님께 용서를 빈다. 아니, 키를 작게 낳아 주신 덕분에'작은 거인'이란 얘길 듣게 됐으니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난쟁이가 작은 거인이 되다니!'
역경의 한파에 떨고 있는 세인들이여!
모든 악조건은 나를 위대하게, 빛나게 만들기 위해 있는 것들이니 .
엄동설한의 모진 한파가 아무리 맵고 아리더라도 기죽지 말고 힘을 낼 지어다.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남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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